사회/시사

(번역)왜 기술 체제는 스스로 무너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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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익명 조회 384회 작성일 2021-03-12 10:14:1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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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시어도어 카진스키
출처: Anti-Tech Revolution: Why and How

Why the Technological System will destroy itself

“최근에 우리는 민주주의의 압도적인 승리와, 최후의 국제적 합의에 도달한 덕분에 행복한 ‘역사의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순진한 우화를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완전히 다른, 완전히 새로운, 두려운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보고, 느끼고 있다.” - 알렉산더 솔제니친

“자연에게 있어, 권력은 권리의 본질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I. 이 책에서 다루어진 대부분의 논리들은 충분히 탄탄하다. 하지만 이 장에서, 우리는 위험을 감수해 가정들을 세우고, 가정으로부터 추론을 이끌어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과 추론들이 인간 사회의 미래에 대한 그럴듯한 결론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진실을 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논리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두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첫째, 우리의 가정들과 추론들은 현재의 대규모 복잡 사회의 발전에 충분히 합리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둘째, 누구든지 현대 사회의 미래에 대해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 장에서 다루어진 논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비록 우리는 여기서 복잡 사회에서의 경쟁과 자연선택 과정에 주목하고 있지만, 우리의 관점을 (지금은 폐기된) “사회진화론”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진화론은 사회 발전의 자연선택적 요소만을 다루지 않았다. 사회진화론은 “적자생존”의 승자들을, 패배자들보다 우월한 인간이라고 간주했다:

“기업 간의 경쟁적 투쟁은 그저 기업인으로써가 아니라, 문명의 챔피언으로써 누가 가장 “적합”한지 겨루는 시합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기업인들은 그들의 물질적 우월감을 도덕적, 지적 우월감으로 바꾸었다… 사회진화론은 누군가는 권력을 쥐고 누군가는 빈곤으로 추락하는 경쟁 과정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이를 정당화 하는 수단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 발전에 자연선택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우리는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자들에 대한 어떠한 긍정적인 가치 판단도 하지 않는다.

II. 우리는 여기서 자가증식 체제에 대해 다룰 것이다. 자가증식 체제는 스스로의 생존과 증식을 추구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체제는 둘 중 하나의 방향으로 증식한다: 체제는 끝없이 스스로의 크기와 힘을 키워나가거나, 자신의 특성을 새로운 체제에게 물려준다.

가장 분명한 자가증식 체제의 사례는 생물학적 유기체들이다. 예를들어, 늑대 무리와 꿀벌군체 같은 생물학적 유기체들의 ‘집단’ 역시 자가증식 체제가 될 수 있다. 이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자가증식 체제는, 예를들어, 국가, 기업, 노동조합, 종교, 정치적 정당 같은 인간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학파, 사회관계망, 서브컬쳐 집단 같은 뚜렷하지 않고 조직화되지 않은 집단들이 있다. 개별의 늑대, 벌에게는 자신의 집단을 증식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없지만, 늑대무리나 꿀벌군체가 스스로 증식하는 것처럼, 인간 역시 개인에게는 자신의 집단을 증식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없지만 자신이 속한 집단을 증식시킨다.

(자가증식 여부와는 별개로) A와 B가 어떤 형태의 체제이고, A가 B의 부품일 때, A를 B의 하위체제라고 하고, B를 A의 상위체제라고 하자. 예를들어, 수렵채집인 사회에서, 개인은 무리에 속해있고, 무리는 부족에 속해있다. 개인들, 무리들, 부족들은 모두 자가증식 체제이다. 개인은 무리의 하위체제이고, 무리는 부족의 하위체제이다. 부족은 부족에 속한 무리들의 상위체제이고, 각각의 무리는 무리에 속한 개인들의 상위체제이다. 또한 각각의 개인은 부족의 하위체제이다. 부족은 부족에 속한 무리들에 속한 개인들의 상위체제이다.

자연선택의 법칙은 생물학에만 적용될 뿐만 아니라, 자가증식 체제가 존재하는 모든 환경에 적용된다. 이 법칙은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생존과 증식에 최적화된 특성을 가진 자가증식 체제들이 다른 자가증식 체제들보다 더욱 잘 생존하고 증식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건 동어반복이고, 새롭게 알려주는 것이 없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요소들에 집중하게 해준다.

우리는 여러 개의 전제들을 제시할 것이다. 우리는 이 전제들을 증명할 수 없지만, 이들은 직관적으로 타당하며, 생물학적 유기체들과 (형식적이든 비형식적이든)인간 집단들로 대표되는 자가증식 체제들의 행동을 통해 관측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이 전제들이 참, 혹은 충분히 참이라고 믿는다.

전제 1. 어떤 환경이든 충분히 풍족하면, 자가증식 체제들이 등장할 것이며, 자연선택으로 인해 대단히 복잡하고, 절묘하고, 정교한 생존, 증식 수단을 가진 자가증식 체제들이 진화할 것이다.

자연선택은 상대적으로 특정 기간에 작동한다. 어떤 지점을 영점이라고 부르자. 영점으로부터 5년동안 (다른 자가증식 체제들과의 경쟁 속에서)생존하고 증식하는데에 가장 적합한 자가증식 체제들이 영점으로부터 5년동안 가장 잘 생존하고(또는 생존을 잘하는 자손을 갖고) 증식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영점 이후 30년간 (5년동안은 경쟁없이)생존하고 증식하는데에 가장 적합한 자가증식 체제들하고 반드시 같지는 않을 것이다. 유사하게. 영점으로부터 30년간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체제들은 처음 30년은 경쟁 없이, 2백년간 생존하고 증식해온 체제들과 반드시 같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들어, 숲으로 덮인 지역에 서로 경쟁하는 작은 왕국들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더 많은 농지를 확보하는 왕국들이 더 많은 작물을 키울 수 있고, 다른 왕국들보다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다. 이는 그들에게 군사적 우위를 가져다 준다. 어떤 왕국이 장기적인 관점을 갖고, 벌목을 자제한다면, 그 왕국은 군사적으로 불리해지고, 더 강한 왕국들에 의해 제거될 것이다. 따라서 망설임없이 나무들을 베어버리는 왕국들이 그 지역을 지배할 것이다. 지나친 벌목은 생태학적 재앙을 가져올 것이고, 결국 모든 왕국들은 멸망할 것이다. 왕국들에게 단기간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심지어 필수적이기까지 한 무차별적 벌목이 장기적으로는 왕국을 종말로 이끈다.

이 사례는 자가증식 체제가 스스로의 장기적 생존과 증식을 위해 선견지명을 발휘하면, 단기적 생존과 증식에 제한을 받게되고, 이 체제는 단기적 생존과 증식을 무제한으로 추구하는 다른 자가증식 체제들과의 경쟁에서 불리해짐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다음 전제에 도달한다:

전제 2. 단기적으로, 자연선택은 장기적인 결과에 신경쓰지 않고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가증식 체제들을 선호한다.

이 전제는 다음의 전제로 이어진다.

전제 3. 주어진 상위체제의 하위체제들은, 자신의 상위체제와 상위체제에 만연하는 조건들에 의존한다.

이는 상위체제가 무너지거나, 상위체제의 환경이 급격하게 변한다면 하위체제들은 생존, 증식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충분한 선견지명을 갖고 있는 자가증식 체제는 상위체제가 무너지거나, 불안정해지더라도 스스로와 그 자손들의 생존을 대비할 수 있다. 그러나 상위체제가 안정정으로 유지되는 한, 자연선택은 상위체제에서 최대한 많은 이득을 챙기는 하위체제들을 선호하고, 상위체제가 불안정해지는 상황을 대비하는데에 자원을 “낭비”하는 하위체제들을 불호한다. 이런 환경에서, 하위체제들은 자신들이 속한 상위체제가 불안정해질 때 생존하기 대단히 힘들어질 것이다.

이 장에서 제시한 다른 전제들과 마찬가지로, 전제 3 역시 상식으로 뒷받침된다. 만약 상위체제가 약하고 느슨하게 조직되었거나, 하위체제들의 환경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하위체제들은 상위체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특정 지역의 수렵채집인들은, 하나의 핵가족이 자신이 속한 무리의 도움 없이 생존하고 증식할 수 있다. 수렵채집 부족들은 느슨하게 조직되었기 때문에, 거의 언제나 수렵채집인 무리들은 자신이 속한 부족과는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노동조합들은 AFL-CIO 같은 노동조합연맹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생존할 것이다. 이는 노동조합들의 환경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조합의 활동을 보장하는 법률과 헌법이 폐지되거나, 현대산업사회가 무너질 경우 노동조합들은 생존할 수 없다.

체제의 부품들이 서로 신속하게 소통하고 물자를 공급할 수 없다면, 체제가 스스로의 생존과 증식을 위해 효과적으로 조직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또한, 자가증식 체제는 자신의 모든 부품들로부터 신속하게 정보를 얻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따라서,

전제 4. 이동, 통신 문제는 자가증식 체제가 그 기능을 확장할 수 있는 지리적 범위에 한계를 둔다.

인간의 경험에 따르면:

전제 5. 활용 가능한 이동, 통신 수단의 한계는 자가증식 인간 집단의 지리적 활동 범위를 제한하는 가장 일관적으로 중요한 한계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자가증식 인간 집단이 활동범위를 최대로 넓히지는 않지만, 자연선택은 활용 가능한 이동, 통신을 이용해 활동 범위를 최대로 확장하는 자가증식 인간 집단을 만들어낼 것이다.

인류 역사를 통해 전제 4와 전제 5를 확인할 수 있다. 원시인 무리나 부족은 보통 그들의 “사유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에서 유일한 이동 수단은 인간의 다리이기 때문에, 그들의 영토는 상대적으로 작다. 하지만, 북미 원주민과 같은, 평야에서 살면서 많은 수의 말을 갖고 있는 원시인들은 훨씬 큰 영토를 갖는다. 산업화 이전 문명의 제국들은 넓은 영토를 갖고 있었지만, 이들은 상대적으로 빠른 이동통신 수단을 갖고 있거나, 발명했었다. 이 제국들은 특정 지리학적 크기에 도달한 후, 확장을 중단하고, 불안정해지고, 여러 개의 작은 정치 집단들로 쪼개지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이 제국들이 확장을 중단하고 불안정해진 이유는 아마도 그들의 이동통신 수단들이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지구상의 어느 두 지점이든 빠르게 이동할 수 있고, 실시간에 가까운 통신이 가능하다. 따라서,

전제 6. 현대에는, 자연선택은 지구 전체에서 활동하는 자가증식 인간 집단들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인류가 언젠가 기계나 다른 존재에 의해 대체되더라도, 자연선택은 여전히 지구 전체에서 활동하는 자가증식 체제들을 만드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현재의 상황은 이 전제를 강하게 확인해준다: 우리는 세계적 “초강대국들”, 다국적 기업들, 세계적 정치 운동, 세계적 종교들, 세계적 범죄조직 등을 보고 있다. 우리는 전제 6이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 아닌, 자가증식 체제의 일반적인 성질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류가 다른 존재에 의해 대체되더라도 이 전제는 참일 것이다: 자연선택은 전지구적 활동을 하는 자가증식 체제들을 만들고 유지할 것이다.

이런 체제들을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라고 부르자. 전세계적인 고속 통신망의 등장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최근에 발생한 현상이며, 그로 인한 결과는 아직 전부 등장하지 않았다. 미래에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이 지금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전제 7. (오늘날처럼) 이동통신 수단 문제가 자가증식 체제가 활동할 수 있는 지리적 범위에 유의미한 제한을 두지 않을 때, 자연선택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자가증식 체제에 힘을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 전제 역시 인류의 경험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전제는 인간과는 독립적으로 참이다: 자연선택은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 중 가장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체제를 선호할 것이다. 약한 세계적 또는 대형 자가증식 체제들은 제거당하거나 종속당할 것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자가증식 체제가 보기에 보잘것 없는 소형 자가증식 체제들은 어느정도의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역적 영향력만을 갖을 것이다. 소형 자가증식 체제들이 연합할 경우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에게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형 자가증식 체제들의 연합이 전세계적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한다면, 그 연합 자체가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가 될 것이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기능적 관계를 맺는“세계-체제”에 대해 말해보자. 세계-체제는 자가증식 체제로 여겨져선 안될 것이다. 세계-체제가 자가증식 하는지 안하는지의 여부는 지금으로서는 중요한게 아니다.

요약하자면, 세계-체제는 상대적으로 몇 안되는 극도로 강력한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의 지배를 받는 상태로 다가가고 있다. 이런 세계적 체제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힘을 갖기위해 경쟁할 것이다. 그들은 장기적 결과는 무시하고 단기적인 힘을 추구할 것이다(전제 2). 이러한 조건에서,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의 격렬한 경쟁이 세계-체제를 찢어버릴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직관을 자세하게 설명해보자. 수십억년 동안 지구의 환경은 변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범위 내에서 안정성을 갖고 있었다. 이 환경에서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와 같은 복잡한 생명체가 진화할 수 있었다. 가까운 미래에, 이 행성의 모든 자가증식 인간 집단들과,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완전한 기계기반 체제들은 유사하거나, 좀더 넓은 범위 내에서 진화할 것이다. 전제3에 의하면, 지구의 자가증식 체제들은 이 범위 내의 조건들에 의존해 생존할 것이다. 기계기반 자가증식 체제들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인간 집단들 역시 최근 세계-체제가 조직된 조건들에 의존할 것이다. 예를들어, 경제적 조건들 말이다. 이 조건들의 급격한 변화가 어느정도 제한되지 않는다면, 자가증식 체제들은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의 조건들이 이 제한을 살짝 넘는다고 해서 전세계의 자가증식 체제들이 모두 죽을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제한을 충분히 넘는다면, 많은 자가증식 체제들이 죽을 것이다. 만약 조건들이 제한을 심하게 넘는다면 전세계의 모든 복잡한 자가증식 체제들을 자손없이 죽을 것이다.

전세계에 뻗어있는 현대 기술의 압도적인 힘으로 무장한 채 장기적 결과는 무시하고 즉각적인 권력을 위해 경쟁하는 여러 개의 자가증식 체제들을 고려할 때, 지구상의 모든 복잡한 자가증식 체제들이 자손 없이 죽을 정도로 이 행성의 환경을 이전과는 한참 다르게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의 등장에는 전세계적인 고속, 장거리 이동통신 수단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음을 주목하라. 지금 상황이 세계-체제의 급격한 붕괴로 이어질 것으로 볼 수 있는 다른 시각도 있다. 산업재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체제가 재앙적인 붕괴를 겪으리라는 것을 안다. (i)체제가 고도의 복잡성을 띄고 있다.(이는 작은 붕괴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ii) 체제가 팽팽하게 연결되어 있다.(이는 체제의 한 부분의 붕괴가 다른 부분으로 빠르게 퍼짐을 의미한다.) 세계-체제는 옛날에도 복잡했었다. 새로운 요소는 전세계적인 이동통신 수단이다. 이로 인해 지금 세계-체제와 모든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은 팽팽하게 연결되어 있다. 비교적 최근까지, 자가증식 체제들은 지역에 국한된 현상이었다. 따라서 그들 사이의 경쟁으로 인한 파괴적인 효과 역시 지역에 국한되었다. 오늘날,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은 전세계에 걸쳐 경쟁하기 때문에, 그들은 팽팽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체제가 그 자체로써 팽팽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기술이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에게 압도적인 힘을 주기 때문에, 세계적 재앙이 조만간 찾아오리라는 것은 거의 명백하다.

이 주장에 대해서,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 간의 파괴적 경쟁이 불가피한건 아니라는 반론이 예상된다: 하나의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가 모든 경쟁자를 제거하는데 성공하고 세계를 홀로 지배할 수도 있다. 아니면,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가 몇개 없기 때문에, 위험하거나 파괴적인 형태의 경쟁을 자제하자는 합의에 도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합의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그런 합의를 도출하고 시행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한번 봐라: 오늘날의 세계의 주요 세력들은 핵무기 제거나 이산화탄소 배출 제한에 관해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한번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모든 경쟁자들을 제거한 하나의 통일된 체제가 등장해 세계를 지배하거나, 여러개의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이 파괴적인 경쟁을 중단하자는 합의에 도달할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이렇게 얻은 “세계 평화”는 별도의 세 가지의 이유로 인해 불안정할 것이다.

첫째, 세계-체제는 여전히 고도로 복잡하고 팽팽하게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학자들은 산업 체제를 만들 때 “비동조화(decoupling)”라는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권한다. 비동조화는 체제의 한 부분에 발생한 결함이 다른 부분으로 전달되는 것을 막는 “장벽” 역할을 한다.화학공장, 원자력 발전소, 금융 시스템과 같은 세계-체제의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하위체제에 대해서는 이론상으로 이런 수단들이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 하지만 페로우(Perrow)는 우리 사회의 이런 제한적인 체제들조차도 붕괴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재설계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체제 전체는 더욱 복잡해지고 연결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과정을 되돌리고 세계-체제를 “비동조화”하기 위해선 전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발전을 규제하는 정교한 계획을 설계, 시행, 집행해야한다. 우리가 이 책의 1장에서 길게 설명했듯이, 그러한 계획은 절대 성공적으로 실현될 수 없다.

둘째, “세계 평화”를 얻기 전에, 그리고 스스로의 생존과 증식을 위해, 해당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상위체제)의 하위 자가증식 체제들은 상위 체제에(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가해지는 외부위협에 맞서 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서로 간의 갈등을 중단하거나 완화시켜야할 것이다. 사실, 자신의 강력한 하위 자가증식 체제들의 경쟁을 완화시키지 못했다면 그 상위체제는 애초에 성공적인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가 경쟁자들을 제거하거나, 다른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과 위험한 경쟁을 하지 않기로 합의하면, 자가증식 체제를 통합시켰거나, 체제 내부의 경쟁을 완화시켰던 “즉각적인” 외부위협이 사라질 것이다. 자가증식 체제들은 장기적 결과와는 상관없이 경쟁한다는 전제 2에 따르면, 해당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 내부의 강력한 하위 자가증식 체제들 사이의 파괴적인 경쟁이 시작될 것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세상의 사건들, 전쟁과 혁명들은 집단에 의해 수행된다.”고 지적했다. 프랭클린에 따르면, 각각의 “집단”들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한다. 하지만 “일단 집단이 충분한 이익을 얻고나면”, 따라서, 더 이상 외부로부터 위협당하지 않을 때, “각각의 구성원들은 서로를 방해하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시작하고, 집단은 분열되고, 혼돈이 찾아온다.”

역사는 거대한 인간 집단들은 당면한 외부의 위협이 없을 때 작은 집단들로 분열하며, 장기적 결과에는 신경쓰지 않고 경쟁하는 강한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여기서 주장하는 바는, 이런 경향이 인간 집단 뿐만 아니라, 자연선택의 영향 하에 있는 자가증식 체제에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향은 인간의 성격적 결함과는 무관하며, 설령 소위 인간의 결점들이 “치료”되거나, (기술성애자들이 원하는대로)인간이 지적인 기계들로 대체되어도 이 경향은 계속될 것이다.

세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상위체제에 가해지는 외부의 위협 없이도 강력한 하위 자가증식 체제들이 파괴적인 경쟁을 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여전히 위에서 묘사된 “세계 평화”는 다른 이유로 인해 불안정할 것이다.

전제 1에 의해, “평화적인” 세계-체제의 내부에서, 자연선택에 따라, 지배적인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교묘하고 정교한 수단, 또는 들켰을 때 억압을 피할 수단을 갖고 있는 새로운 자가증식 체제가 등장할 것이다. 애초에 자가증식 체제들의 등장을 가능케 했던 진화의 과정과 똑같은 과정을 통해, 새로운 자가증식 체제들은 점점 더 강해지다가, 결국에는 기존의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에게 도전할 정도로 강력한 체제가 등장할 것이다. 이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파괴적인 경쟁이 지속될 것이다.

설명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이 과정을 단순하게 묘사했다. 마치 애초에 세계-체제가 비교적 위험한 경쟁으로부터 자유롭게 형성되고, 그 다음에야 새롭게 등장한 자가증식 체제들에 의해 제거될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현존하는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과 함께 새로운 자가증식 체제들이 등장할 것이고, 앞서 가정한 “세계 평화”를 막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이 현상을 직접 보고있다. 가장 분명한 사례는, 법률과 질서에 도전하고 있는 어떠한 이상적 동기도 없는 범죄조직들 뿐만 아니라 테러리스트 네트워크, 해커 단체 같은 (비교적)새로운 자가증식 체제들이다. 마약 카르텔들은 멕시코의 정상적인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을 공격한 테러리스트들 역시 그러했다. 이라크 같은 나라에서 테러리스트들은 더욱 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심지어 무법적 자가증식 체제들은 케냐의 마약 카르텔들 처럼 주요 국가들을 장악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정치적 “기계”들은 반드시 범죄조직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보통 어느정도의 불법활동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정부의 “합법”적 구조에 도전하거나, 심지어 장악하기까지 한다.

현재와 가까운 미래에는, 완전히 합법적인 수단, 또는 그들의 목적을 위해 최소한의 불법적 수단을 사용하고, “민주주의”, “사회정의”, “번영”, “도덕”, 또는 종교적 원칙과 같은 나름대로 정의로운 이유를 들며 자신의 수단을 정당화하는 더욱 중요한 자가증식 체제들이 등장할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전적으로 합법적인)초강경 근본주의 종파가 놀라울 정도로 강해졌고, 지금까지 세속적이었던 국가의 가치와 목표를 전복하려는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그리고 완벽하게 합법적으로)등장했다. 그들은 고작 19세기 후반부에 등장했다. 지금도 새로운 기업들이 형성되고 있다. 일부는 낡은 기업들에게 도전할 정도로 강해진다. 지난 수십 년 간 많은 기업들이 국제화되었고, 그들의 힘은 국가권력과 맞먹기 시작했다.

정부가 자신의 목표를 위해 만든 종속체제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가증식 체제로 변하고, 심지어 정부를 지배할 수도 있다. 관료들은 보통 그들의 공적 책임을 완수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권력과 안정을 유지하는데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모든 관료제는 자신을 보전하고, 기생하려는 경향을 갖게된다. 또한 관료제는 자신의 권력, 자율성을 추구하는 경향을 갖게된다. 이로 인해 정부는 관료에 대한 통제를 잃게된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관료제는 지배 권력이 되었다. 군부는 많은 경우에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부여받고, 정부를 대체하고 나라의 지배적 정치권력이 된다. 요즘에는 노골적인 군사 쿠데타가 과거에 비해서 인기가 없는 것 같다. 정치적으로 세련된 장군들은 민간정부를 꼭두각시로 내세우고 배후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선호한다. 장군들은 공공연하게 개입해야할 필요가 있을 때, “민주주의”나 비슷한 이상을 위하고 있노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파키스탄과 이집트에서 이런 형태의 군사 지배를 볼 수 있다.

지난 수십 년간 미국에서 등장한 두 개의 완전히 합법적인 자가증식 체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좌파와 교조적인 우파이다.(과거의 미국에 존재했던 자유주의, 보수주의와 헷갈려선 안된다.) 이 책은 두 집단의 투쟁 결과에 대해 논하는 자리가 아니다. 장기적으로 알 카에다의 모든 폭탄들과 멕시코 마약 카르텔들의 모든 살인들의 총합보다, 이들의 치열한 투쟁이 평화로운 세계질서 건설을 더욱 극심하게 방해할 것이라고 언급하는 정도로 충분하다.

냉혹한 현실을 직면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앞에서 설명한 파괴적 경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막도록 세계-체제를 설계하고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길 원할 것이다. 하지만 1장에서 우리는 왜 그런 계획이 결코 현실에서 시행될 수 없는지 설명했다. 예상되는 반론은, 포유류(또는 다른 복잡한 생명체)가 소위 세포라는 수백만개의 자가증식 체제들로 이루어진 자가증식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암이 발생하지 않는 한) 동물의 신체 내부에서 세포 또는 세포집단 간의 파괴적인 경쟁은 없지 않냐는 것이다. 경쟁 대신, 모든 세포들은 전체의 일부로써 동물의 이익을 위해 충실하게 복무한다. 또한, 외부의 위협 없이도 동물의 세포들은 그들의 의무에 충실하다. 세계-체제를 포유류의 신체처럼 설계해서, 자가증식 체제들 간의 파괴적 경쟁을 막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유류의 신체는, 수억 년의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의 산물이다. 이는 수억 년 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세대 교체 기간을 Δ라고 가정한다면, 첫 세대 중 Δ시간 동안 두번째 세대를 생산해낸 개체들만이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세번째 세대까지 살아남은 혈통들은 오직 2Δ 시간의 시험을 통과한 혈통들 뿐이다. 네번째 세대까지 살아남은 혈통들은 오직 3Δ 시간의 시험을 통과한 혈통들 뿐이다. 이렇게 계속 이어진다. n번째 세대까지 살아남은 혈통들은, 더 짧은 시간을 통과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오직 (n-1)Δ 시간의 시험을 통과한 혈통들 뿐이다. 앞선 설명은 무리하게 간략화되었지만,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에선, 유기체의 혈통이 수천만년간 짧은, 중간의, 긴 모든 범위의 시험들을 통과해야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자면, 유기체의 혈통은 일련의 수백만개의 필터들을 통과해야 한다. 다양한 길이의 각각의 필터에서 (다윈주의적 의미에서) 가장 “적합”한 혈통만이 통과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만을 통해 동물의 혈통을 짧은 기간, 중간 기간, 긴 기간 생존하도록 만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한 역학을 지닌 포유류의 신체가 진화될 수 있었다. 이 역학에는 동물의 신체 내부에서 세포 또는 세포 집단 간의 파괴적 경쟁을 막는 역학도 포함된다.

또한 생물학적 유기체의 세대마다 많은 개체수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멸종 직전까지 간 종들은 개체 수가 몇천 정도로 줄었던 적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포유류들은, 다세포 유기체가 등장한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진화 역사를 통틀어 각 세대는 언제나 “적합”한 수백만의 개체수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자가증식 체제들이 세계적 규모에 도달하면, 두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발생한다. 첫번째 차이점은 “적합”한 개체 수의 차이다. 세계를 지배할 만큼 충분히 거대하고 강력한 자가증식 체제들은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에 불과하다. 분명, 백만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적합”한 개체 수가 지나치게 부족함으로 인해, 지배적인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 간의 자연선택 과정은 비효율적일 것이다. 생물학적 유기체의 경우, 개체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대형 종들은, 개체 수가 많은 소형 종들에 비해 멸종에 더욱 취약하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할 것이다. 비록 생물학적 유기체들과 인간의 자가증식 체제들 간의 비유는 완벽과는 거리가 멀지만, 몇개의 지배적인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로 이루어진 세계-체제의 장래는 어두워 보인다. 두번째 차이점은 전세계적 고속 이동통신 기술의 부재이다. 소규모 자가증식 체제의 붕괴 또는 파괴적 행동은 오직 지역적 영향만 주었다. 그러한 자가증식 체제의 제한된 활동 영역을 벗어나면, 다른 자가증식 체제들의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는 계속된다. 하지만 전세계적 고속 이동통신 기술로 인해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이 등장했고, 그러한 체제들 중 하나의 붕괴 또는 파괴적 행동은 세계-체제 전체를 뒤흔들 수 있다. 결과적으로,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의 시행착오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횟수의 “시도”가 “오류”를 낳을 가능성이 높고, 세계-체제는 붕괴하거나 심각하게 망가져서 세계의 모든 대규모 복잡 자가증식 체제들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자가증식 체제들에게 있어서 시행착오 과정을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이 내부의 복잡 생물학적 유기체들 간의 파괴적 경쟁을 막는 정교하고 복잡한 역학을 갖출 수 있게 해줄 충분히 긴 자연선택은 불가능하다.

한편, 세계적 자가증식 체제들 간의 격렬한 경쟁은 지구의 기후, 대기구성, 해양 성분에 극단적이고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고, 생물권에 대단히 파괴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이 장의 Part IV에서 우리는 이 사안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아볼 것이다. 우리는 기술적 세계-체제의 발전이 그것의 논리적 귀결점에 도달할 때까지 내버려둘 경우, 지구는 세균, 해조류 같은 극단적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몇몇 단순 유기체를 제외하고 어떠한 생명체도 남아있지 않은 죽음의 행성이 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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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기서 제시한 이론은 소위 말하는 페르미 역설(Fermi Paradox)에 그럴듯한 설명을 줄 수 있다. 기술적으로 진보한 문명이 등장한 무수히 많은 행성들이 있고, 지금쯤이면 우리로부터 멀지 않은 문명의 전파 신호를 찾아냈어야 했다는 것이다. 페르미 역설은 우리의 천문학자들이 외계의 지적생명체로부터 온 듯한 어떠한 전파 신호도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레이 커즈와일에 따르면, 페르미 역설에 대한 흔한 설명 중 하나는 “문명은 일단 전파 기술에 도달하면 스스로를 제거할 것이다”이다. 커즈와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명이 몇개 없다면 이 설명이 괜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명이 무수히 많다면, 모두가 스스로를 파괴했으리라고 믿기는 힘들다.” 문명의 자기 파괴가 우연에 의한 것이라면 커즈와일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진보한 문명들을 지속적으로 자기 파괴로 유도하는 공통된 과정이 있다면, 페르미 역설에 관한 위의 설명은 타당하지 못할 것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과정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오메 빡세게 번역하시네요. 좀 쉬엄쉬엄 하셔도 좋을텐데.. 마지막 페르미 역설에 대한 설명은 재미있네요 ㅎㅎ 전제 1과 2가 크리티컬한 지점이라 느껴지는데 이 지점이 조금 갸우뚱 하기는 하네요. 진화에 관련된 연구들을 교호해서 살펴봐야 할 듯해요. 적어도 카진스키가 매우 진지하게 임했다는 건 느껴져요.

지난 번에 이어 단 한 번의 동성애 원칙(one-time-rule of homosexuality)이 약해져가는 추세를 주장하는 논문입니다. 하지만 이 요약 글에서는 조금 다른 쪽에 초점을 맞춥니다.

시리즈 (2)와 (3) 두 논문 모두 영국 윈체스터 대학의 에릭 앤더슨(Eric Anderson) (https://www.winchester.ac.uk/about-us/leadership-and-governance/staff-directory/staff-profiles/anderson.php) 교수가 참여해 있고, 이 때문의 그의 주요 이론인 동성애 히스테리를 이론적 틀로 활용하고 있는 듯해요.

잉길리 국을 배경으로 한다는 걸 염두에 두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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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ats, R., Joseph, L. J., & Anderson, E. (2018). ‘I don’t mind watching him cum’: Heterosexual men, threesomes, and the erosion of the one-time rule of homosexuality. Sexualities, 21(1–2), 30–48. https://doi.org/10.1177/1363460716678562

개요

앞선 글에서 짚었듯이 영국, 미국 등 서구 사회에서 특정한 성적 활동을 정상으로 규정하는 경향은 약해지는 추세입니다. 또한 성적인 활동(sexual acts)를 일종의 레저 활동으로 보는 시선도 각국에서 증가하고 있지요. 말하자면, 한 개인이 다양한 성적 경험을 지닐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지는 추세여요.

이 논문은 대학생 30명과 인터뷰를 해서, 이들의 쓰리썸 인식과 경험이 이성애자라는 정체성과 어떤 연관을 맺는지 조사했어요. 특히 동성애 히스테리가 약화되는 맥락 속에서, 남남여 쓰리썸과 여여남 쓰리썸을 어떻게 경험하고 인식하는지 파악하는데 주안점을 두었지요.

남남여 쓰리썸 / 여여남 쓰리썸을 둘 다 살펴본다는 목적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 논문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규제가 약화되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출발해요. 주요한 맥락은 동성애 히스테리의 약화인데, 지난 글 ( https://redtea.kr/?b=3&n=10366 )을 참고해주시면 됩니다. 다시 한 번 짚자면 동성애 히스테리아의 주된 표현 방식인  단 한 번의 동성애 원칙(The one time rule of homosexuality)은 이성애자 남성이 동성 간 성적 행위를 경험한 경우 남성 동료들 사이에서 동성애자로 간주되는 문화적 경향이에요. 이러한 원칙은 원칙 그 자체를 넘어, 사회가 남성 이성애자들에게 더욱 깐깐한 잣대를 들이밀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해요. 이러한 사회적 압력이 약화되는 징후들은 지난 글에서도 엿보았지요.

섹슈얼리티 변화를 보여주는 다른 예로는 오락적 섹스(recretional sex)의 증가가 있어요. 과거에는 비정상적으로 취급받았던 성적 활동들이 일반적으로 바뀌고 심지어 기대되기도 해요. 잉글랜드 등(England et al, 2008)은 젋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캐쥬얼한 섹스가 로맨스나 연애보다 더 지배적으로 자리잡았다는 주장을 하지요.

포르노 접근성의 향상은 상기한 오락적이고 리버럴한 섹슈얼리티 문화의 한 배경으로 지적되어요. 포르노가 보편화 되면서 이성애자 남성들이 다양한 성적 활동에 노출되고, 여기에는 남-남의 성적 상호교류도 포함되어요.

추가로 지적해야 할 점은 포르노와 섹슈얼리티 그 자체를 소비자 경험으로 바라보는 경향입니다. 소비라는 관점 속에서 개인들은 매번 다르고, 다양하고, 독특한 경험을 추구하려는 욕망을 지녀요. 섹슈얼리티를 상품으로 바라보면 친구와 함께 섹슈얼리티를 경험하려는 욕망, 새롭고 다른 섹스를 경험하고자 하는 욕망을 소비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지요.

그럼 이 글의 주제인 쓰리썸으로 들어가볼게요. 포르노그라피 사이트에서 쓰리썸은 성별 불문하고 인기 있는 주제지요(이 요약 글을 쓰면서 2019년 pornhub 통계를 확인해봤는데, 여성의 경우 쓰리썸이 4위, 남성의 경우 10위를 차지했더라고요). 하지만 그 일탈적인 성격 때문에 학계에서 연구가 잘 안 되었어요.

게다가 쓰리썸을 직접적으로 조사한 몇 안 되는 연구들은 여여남 쓰리썸을 조사했어요. 저자들은 여여남 쓰리썸이 남남여 쓰리썸보다 보다 사회적으로 수용가능하다는 특징이 반영된 것이라 보면서 이 또한 동성애 히스테리의 반영이라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는 남남여, 여여남 모두를 조사 대상으로 삼습니다.

연구방법

스스로 이성애자로 정체화 한 30명의 남성과 반구조화 된 인터뷰를 실시했습니다. 학계에서 개발된 성적 정체성 지표와 동성애자에 대한 태도 지표를 학기 초에 설문했고, 당시 파악한 정체성 지표를 가지고 대상을 선정해서 18개월 후에 평균 45분 정도의 인터뷰를 실시했어요. 시차를 둔 이유는 설문 직후에 인터뷰를 할 경우 학생들의 반응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인터뷰 참여자들은 대부분 중산층, 백인 남성 대학생입니다. 따라서 향후 이 연구를 향후 양적 연구의 해석틀로 활용할 때는 주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학기 초에 실시한 동성애자에 대한 태도 지표와 인터뷰에서 나온 학생들의 태도는 높은 수준의 일치도를 보였어요. 이러한 자료의 삼각검증(triangulation)은 질적 연구의 신뢰성(trustworthy)을 높이는 주요 방법이지요. 인터뷰 자료의 분석은 차마즈(Charmaz)의 근거 이론 방법을 적용했다고 하는데... 지속적 비교 분석이 아닌 듯해서 근거이론이 맞나 조금 갸우뚱 합니다. 제가 제한적으로 알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지만요.

여튼 본문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중 일부

남남여 쓰리썸을 정상화하기(Normalizing MMF threesomes)

연구참여자 중 10명, 그러니까 1/3은 쓰리썸을 경험했습니다. 그 중 여섯 명은 한 번 이상 해봤고요. 대학이라는 특성, 다양한 성적 관계를 실험하는 성인기 초기의 경향을 고려할 때 연구참여자들을 3학년 이상으로 모집했으면 경험자의 비율은 또 달랐겠지요.

쓰리썸 경험자 10명 중 한 번 이상의 여여남 쓰리썸을 경험한 사람은 일곱이었고, 한 번 이상의 남남여 쓰리썸을 경험한 사람은 다섯이었어요. 말인즉슨 두 명은 양 쪽 모두에 참여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남남여 쓰리썸이 필연적으로 남성 간 동성 섹스를 동반하지는 않아요. 인터뷰에서 보고된 많은 경험들은 어깨를 만진다거나 하는 식이지, 여성 파트너와 같은 수준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지는 않았거든요.

쓰리썸은 다양한 조건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여요. 롭은 쓰리썸을 연인 관계의 틀 내에서 경험했어요. "두 번 해봤어요. 한 번은 여자친구랑, 걔 좋아하는 다른 여자애랑 해봤고요. 다른 한 번은 저랑 여자친구 둘 다 잘 모르는, 여행 중에 만났던 다른 여자애랑 해봤어요" (I’ve had a total of two. I’ve had one with my girlfriend and a girl who liked her. The other was with someone neither of us knew very well, also a girl, who we met while traveling’). 하지만 제이콥은 연인 관계 뿐만 아니라 그 밖에서도 쓰리썸을 경험했어요.

"한 번은 여여남으로 해봤고요. 한 번은 남남녀로 해봤어요. 그리고 나서는 넷이서 해봤네요. 여자애 둘이랑 했을 때는 난 이런 거(쓰리썸) 참여하는 거 별로 거리끼지 않아 하는 애들이었어요. 남남녀로 할 때는 파티에서 해봤는데, 여자애가 둘 중에서 누굴 골라야 할지 진짜 모르겠다라고 해서 하게 되었네요. (I’ve had one with two girls and one with two guys and then I’ve had one experience with a foursome. The two girls was that I was seeing one girl and her friend sort of said, ‘I wouldn’t mind getting in on this’. The [threesome with the] two guys was a girl at a party and she said ‘I can’t really pick between you two.)"

쓰리썸 경험을 해보지 않았다 한 20명은 여여남 쓰리썸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어요. 또한 남남여 쓰리썸을 경험해보지 않은 25명 중 20명은 남남녀 쓰리썸을 해보는데 관심이 있다고 답했지요. 하지만 연구참여자 남성들은 조건을 하나 달았어요. 20명 중 14명은 친한 친구거나 브로맨스인 남자가 참여하기를 원한다고 했거든요. 아무라도 상관없다는 건 여섯이었지요.

잭은 친구 앞에서라면 벗어도 완전 편한데요, 잘 모르는 남자 앞에서는 좀 그렇네요 (I’d feel completely comfortable being naked around my mates, but I’d feel uncomfortable or weird around a guy I don’t know)라고 말했어요. 토니는 모르는 사람이 친구 만큼 편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고 해요.

"당연히 아는 사람과 하는 게 낫지요.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더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겠지요. 모르는 사람이랑 만나서 하고 싶어? 좋아 가자고 하기는 힘들잖아요. 그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요. 근데 내가 어떤 애를 알고, 걔가 얼마나 열려있는지도 알고, 내 포지션도 알면 한결 편하지요 (I’d prefer it to be someone I knew, definitely someone I knew. I don’t know why, I’d just feel a lot more comfortable. I’d struggle to just meet random people and say, ‘Fancy a fuck? Cool, let’s go’. You never know what the guy’s gonna be like. But if I know the guy and I know how open we are, and I know where I stand, it would be more comfortable)."

친한 친구와 함께 쓰리썸에 참여하기를 원한 14명은 브로맨스(bromance)라는 용어를 썼어요. 브로맨스 관계인 친구는 성적인 부분만 제외하면 여자친구와 비슷한 수준의 감정적, 친밀성, 육체적 접촉 수준을 보여주지요. 앤더슨과 맥코맥(Anderson & McCormack, 2015)이 보여주듯이 브로맨스 관계는 서로 몸을 보여줘도 상관없는 정도를 포함하는데, 이는 남남여 쓰리썸의 필요조건이기도 해요.

남성사회의 유대감과 남남여 쓰리썸 (homosocial bonding and MMF Threesomes)

연구 참여자들은 쓰리썸을 성적 판타지와 별개로 바라봤어요. 쓰리썸을 경험하지 않은 스무명에게 물어봤을 때, 즐거운 활동(fun activity)나 멋진 농담(great banter)라는 답변이 순수한 성적 즐거움의 추구나, 개인의 성적 판타지의 충족이라는 답변보다 많았어요.

말하자면 남남여 쓰리썸은 즐겁고 유희적인 성적 경험을 소비하여서, 남성 간 유대를 경험하는 것에 가깝다는 거예요. 토니가 말하기로는,

"쓰리썸을 해본 적은 없어요. 제안 받았던 적은 있네요. 고등학교 친구 중 남자애 한 명은 다른 애랑 교제 중이었는데, 걔가 쓰리썸이 신사적인 동의라면서 자기가 그럴 기회가 온다면 저와 같이 하겠다고 그랬었거든요. 근데 그러고 나서 16살 때 여자애 한 명이 다른 여자애랑 셋이서 쓰리썸 하자고 제안한 거예요. 거절했지요. 제 친구와 함께 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I’ve never had a threesome. I’ve been offered. One of my [male] friends from school. He was dating one of our friends, and he kind of said it was a gentlemen’s agreement that if I was going to have a threesome it would have to be with you. Then when I was 16 a girl offered a threesome with a female friend and I turned down both because it wouldn’t have been with my friend)."

크리스포터나 댄도 쓰리썸을 할 수 있으면 친구랑 같이 남남여 쓰리썸에 참여하겠다고 밝혔어요. 댄은 그 이유로 즐거움을 꼽았고요.

실제 남남여 쓰리썸을 경험한 학생들도 남남여 쓰리썸과 즐거움(fun) 사이의 연관을 지지했어요. 매튜는 "상당히 즐겁고, 좋은 경험이었어요. 친구랑 저랑 서로 농담을 주고 받았지요. 재미있고 즐겁더라고요 (It was quite a funny, a good experience. We both had a bit of banter between us. It was quite fun. It was quite enjoyable)"라고 말했어요. 맷은 이어서 "즐거웠어요. 제 가장 친구도 그랬고요. 쓰리썸은 서로 더 친해지기 위해 좋은 방식이어요. 새로운 경험이었지요.(It was quite fun, because it was one of my best mates as well, and it was a good way to bond with him in that sort of way. It was just a new experience)" 라고 말했어요. 왜 절친을 쓰리썸에 초대했냐고 묻자, 친구가 즐거워 할 것이라 생각했고, 함께 쓰리썸에 참여하는 것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고, 절친이라 이전에 서로 벗은 몸을 본 적이 있어서 거부감이 적으리라 생각했다고 답했지요.

맷이 자신의 쓰리썸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은 몬테무로 등(Montemurro et al., 2003)이 남성 스트립쇼에 참여하는 여성들의 경험을 이해한 연구와 맞닿아요. 여성들은 남성 스트립쇼에 단체로 참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재미와 즐거움을 찾으려는 쪽에 더 집중해요. 성적인 자극이나 휴식을 추구하기 보다는 여성들 사이의 유대를 촉진하고자 하고요.

남남여 쓰리썸 경험을 물었을 때 태평스러운 답변이 많았다는 건 중요해요. 그 누구도 친구가 사정하는 모습을 보며 불편했다고 답하지 않았어요. 브렌트는, "난 걔가 싸는 모습을 봐도 괜찮아요 (I don’t mind watching him cum)"라고 답했어요. 인터뷰 참여자들은 호모포비아, 동성애 히스테리와 연결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혐오 발언이나 남성 신체에 대한 거부감을 보이지도 않았어요.

논의 / 결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논의/결론은 제외합니다.

다만 본문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코멘트에서 연결할 만한 지점이 있어서 하나 적어둡니다.

"하지만 여성을 통해 성적 경험을 공유하겠다는 욕망이 이 남성들이 여성혐오자(misogynist)라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여성을 향한 적개심 대신에, 존중을 찾을 수 있었어요. 물론 당연히 다른 사람들은 이 연구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의 연구는 이성애자 여성들도 남자 두 명을 데리고 쓰리썸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선행연구와 궤를 같이 합니다 (However, a desire to ‘share’ the sexual experience with a woman is not to suggest that these men were misogynist. We found no overt evidence of antipathy toward women and we found them cognizant of respect for women. Others will, undoubtedly, interpret this research differently. Despite one’s interpretation of this, our research confirms other work showing that heterosexual women certainly pursue sex with two men as well (Joyal et al., 2014)."

코멘트?

본문 중 동성애 히스테리나 단 한 번의 동성애 원칙(one-time-rule of homosexuality)의 약화를 다룬 파트는 제외했습니다. 지난 글에서 한 번 다루었던 주제라서요.

오히려 저는 [성적인 즐거움 보다는 참여하는 동성과의 유대 때문에 쓰리썸을 한다]라는 지점이 더 흥미롭더라고요. 비록 남성 스트립쇼 소비라 대상이 다르기는 하지만, 몬테무로 등이 지적했듯이 여성들이 동성 간 유대 형성을 위해 공동으로 성적 소비를 한다는 점과도 연결되고요. 다양한 형태로 쓰리썸에 참여하는 남-녀의 경험과 협상 과정을 함께 연구해 볼 수 있다면 보다 세세하게 포착해 낼 지점이 있겠다만, 아직은 현실적으로 힘들겠지요 뭐...

위의 내용과 함께, 쓰리썸을 아는/믿을 수 있는 사람과 같이 하고자 하는 욕망은 조이얄 등(Joyal et al, 2014)의 캐나다 퀘벡시 조사 자료와도 연결되는데요. 성적 판타지 수준의 논의에서 남남여 쓰리썸을 하고 싶다는 여성보다(30.9%), 여여남 쓰리썸을 하고 싶다는 여성들이 더 많았어요(56.5%). 물론 쓰리썸 판타지는 여성에게서는 14위에 불과했지만요 (남성은 3위). 이 통계는 복수응답 지표이고, 남성들은 판타지 수준에서 여여남 쓰리썸에 84%가, 남남녀 쓰리썸에 15.8%가 응답했다는 점에서 편의적으로 끌어쓰기에는 어폐가 있어요. 하지만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현실적인 면을 더 고려한다는 점을 감안해서 선별적으로 해석한다면, 쓰리썸의 실제에 있어서 안전이나 불편감 등이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해요.

논의/결론에서 저자들이 미소지니를 언급한 점은 재미있어요. 미소지니나 미샌드리는 완전히 별개의 내용으로 다루어야 할 주제이니 여기서 길게 언급하는 건 자칫 논의가 산으로 갈 수는 있겠네요. 본문 연구에 녹아들어간 오락적 섹스, 동성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실험적 경험, 성적 경험의 소비 등은 미소지니/미샌드리와 엮어서 생각해 볼만한 주제라는 점만 언급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다음 주제인 BDSM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룰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요약하면서 인용한 참고문헌

Anderson, E & McCormack, M (2015) Cuddling and spooning: Heteromasculinity and homosocial tactility among student-athletes. Men and Masculinities 18(2): 214–230.
England P, Shafer EF and Fogarty ACK (2008) Hooking up and forming relationships on today’s college campuses. In: Kimmel M (ed) The Gendered Society Reader.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pp. 531–593.
Joyal CC, Cossette A and Lapierre V (2014) What exactly is an unusual sexual fantasy? The Journal of Sexual Medicine 12(2): 328–340.
Montemurro B, Bloom C and Madell K (2003) Ladies night out: A typology of women patrons of a male strip club. Deviant Behavior 24(4): 333–352. 호호, 부끄러워하지 마셔요. 제가 열심히 총대 메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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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그렇겠네요. 한국 정서에서는 이게 더 보편적일지도...

친구에게 몸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친구 몸을 보는 것도 그닥이구요 크크
다시 만날 때마다 생각날 것 같은데요

오 이유는 무엇이신가요?

재밌네요. 사랑은 다다익선이죠!
저는 왠지 남남여는 친구보다는 모르는 남자를 더 선호할 것 같네요 크크

어머 저는 모르는 만화네요!

예전에 다세포소녀 쓰리썸 만화가 생각이 나네요.
막 서로 부딫히고 엉키고 불편해서 헉헉대는 결론 ㅋㅋ

네네, 반박하거나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고, 저는 블랙박스를 열어보기 전까지는 알기 힘들지 않나 싶어서요.

말씀하셨던 부분은 분명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해요. 다만 분위기에서 만족하는 양상은 여성들에게 더 크다고 하고, 다른 남성이 삽입하는 광경을 포르노 보듯이 감정이입해서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ㅎㅎ

계속 구경만 하진 않겠죠.. 근데 한 성별이 2명이면 고전적인 의미의 삽입섹스를 즐기지 못하는 시간이 분명 생길테니까.. 저 같으면 아쉬울 것 같은데 그 시간동안 얻을 수 있는 시각적 즐거움을 남성이 여성보다 더 누릴 수도 있지 않나 싶어서요.

왜 구경하는 입장으로만 생각하시는 거지요! 얼마나 할 수 있는 게 많은데유,,,

[참여자들에게 즐거움이나 다시 해볼 의향같은 걸 조사해보면, 남남여/여여남 중에 어떤 게 더 만족도가 높은지 알 수 도 있을 것 같네요.]

이거는 사회과학 연구의 필연적인 한계 같은 건데요, 일종의 자연실험에 가깝다보니 연구자가 원하는대로 설계를 할 수가 없어요ㅠ 무작위비교연구(RCT)하면 딱 원하는 결과가 나오겠지만, 할 수가 음습니다ㅠ 뭐 그만큼 현실에 밀착한 자료를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지만요.

여성의 쓰리썸 경험을 인터뷰한 논문도 찾아서 병기하고 싶었는데, 하나 찾은 [Rupp et al. (2013). Queer Women in the Hookup Scene: Beyond the Closet?]이 젠더퀴어 관점에서 쓰여서 같이 적기가 애매하더라고요. 제가 주전공이 아니라 서칭 능력이 부족해서 ㅎㅎ; 찾아보면 있기는 있지 않을까 싶어요.

위에 언급해주신 우에노 치즈꼬, 이브 세즈윅의 관점, 지난 주 ~ 이번 주에 활용한 앤더슨의 호모 히스테리아 관점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남성들에게는 동성애 성향의 억압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에요. 성... 더 보기
여성의 쓰리썸 경험을 인터뷰한 논문도 찾아서 병기하고 싶었는데, 하나 찾은 [Rupp et al. (2013). Queer Women in the Hookup Scene: Beyond the Closet?]이 젠더퀴어 관점에서 쓰여서 같이 적기가 애매하더라고요. 제가 주전공이 아니라 서칭 능력이 부족해서 ㅎㅎ; 찾아보면 있기는 있지 않을까 싶어요.

위에 언급해주신 우에노 치즈꼬, 이브 세즈윅의 관점, 지난 주 ~ 이번 주에 활용한 앤더슨의 호모 히스테리아 관점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남성들에게는 동성애 성향의 억압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에요. 성적 정체성을 본인의 자기보고를 바탕으로 측정하지만, 애초에 본인의 성적 정체성 인식부터가 사회의 영향과 독립해있지 않다는 점은 주의해야 하거든요.

지난 번에 다크쵸코님이 날카로운 지적을 해주셨었는데 (https://redtea.kr/?b=3&n=10366&c=140312)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의 정체성 보고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합한가? 애초에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닌가? 라는 지적이지요.

Rupp et al. (2013)가 여성들의 쓰리썸 참여 경험을 젠더 퀴어(동성애)라는 관점에서 해석했지만, 애초에 동성애 억압이 여성들에게 더 약하게 적용되는 상황에서 저런 구분이 얼마나 유효할까 싶은 의문도 드네요 ㅠㅠ

남남여가 하드코어하다는 생각은 안 해봐서 신기하네요. 아마 여성에게 가해지는 자극의 부하가 강하다는 점에서 남성 친구들이 블로그 주인께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나 싶은데, 삽입당하는 대상을 여성으로 한정해서 바라보는 것도 동성애 히스테리아의 일종이겠지요.

그러게요. 같은 남자, 같은 여자라도 상황 따라 (오래된 연인으로 만나느냐, 원나잇으로 만나느냐 등..)
섹스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다를텐데..
그냥 판타지 한 번 해봤다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쓰리섬은 한 명은 구경하는 입장이 될텐데 남자가 시각 만족도가 더 크다하니..
남남여가 더 좋을지도..?
참여자들에게 즐거움이나 다시 해볼 의향같은 걸 조사해보면
남남여/여여남 중에 어떤 게 더 만족도가 높은지 알 수 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러게요. 1:1에서 합 맞추는 것도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데, 어떻게 2:1에서, 그것도 한 순간의 경험으로 즐거움을 느낀다는 거지? 싶네요.

본문에서는 남남끼리의 유대감이 있어야 남남여로 이어진다는 영국 사례를 이야기 하고 있고 (글에서 생략했지만 남남여 쓰리썸 중에 다른 남성의 애널 삽입을 허용한 경우도 하나 있습니다. 그 연구참여자는 실험삼아 해봤다고 적고 있고요.)

댓글에서는 남남끼리의 유대감을 조장하기 위해 술 + 남남여 쓰리썸을 조장하는 한국 문화를 이야기 하고 있고

약간씩 상황과 맥락이 다르니 세세하게 읽어주시는 걸 추천합니당

여여남은 모르겠어요. 섹슈얼리티는 진짜 연구하기 힘든 영역이라... 몬테무로 등의 연구를 병치하였듯이, 여성들 또한 성... 더 보기
본문에서는 남남끼리의 유대감이 있어야 남남여로 이어진다는 영국 사례를 이야기 하고 있고 (글에서 생략했지만 남남여 쓰리썸 중에 다른 남성의 애널 삽입을 허용한 경우도 하나 있습니다. 그 연구참여자는 실험삼아 해봤다고 적고 있고요.)

댓글에서는 남남끼리의 유대감을 조장하기 위해 술 + 남남여 쓰리썸을 조장하는 한국 문화를 이야기 하고 있고

약간씩 상황과 맥락이 다르니 세세하게 읽어주시는 걸 추천합니당

여여남은 모르겠어요. 섹슈얼리티는 진짜 연구하기 힘든 영역이라... 몬테무로 등의 연구를 병치하였듯이, 여성들 또한 성적 활동을 단체로 소비하여 호모소셜을 꾀하기는 하지만 그게 쓰리썸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더라고요.

남남여에서 여에게 어떠한 즐거움이 있는가도 알기 힘들고요.
일종의 패션으로 소비한다 볼 수도 있겠고(본문 중 "여자애 둘이랑 했을 때는 "난 이런 거(쓰리썸) 참여하는 거 별로 거리끼지 않아" 하는 애들이었어요"),
단순하게 double penetration과 같은 쾌감의 점층을 이야기 해 볼 수도 있을텐데, 아래 맥주만땅님께서 짚어주셨듯이 섹스가 합이 안 맞으면 피곤하고 고역일 뿐이니까요. 포르노는 판타지니ㅠㅠ

또한 읽다보면 느끼셨겠지만 여여남 쓰리썸, 남남여 쓰리썸이라고 해도 구체적으로 섹스 과정에서 어떤 양상이 일어나는가? 누가 누구를 성적으로 자극하는가? 자극하는 과정에서 어떤 신체 혹은 도구를 사용하는가? 등을 좀 더 면밀하게 따져봐야 파악할 수 있는 지점이 있어요.

그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본문의 남남여 쓰리썸을 호모소셜하게 해석하는 것은 끄덕끄덕 해도, 동성애 히스테리의 약화를 가리키는 걸로 해석하는 건 약간 갸우뚱하더라고요.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남 -> 남의 삽입까지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잡는다면 상황은 또 달라지겠지요.

예전에 읽었던 모 블로그 글이 생각납니다. (사실 링크도 찾았는데 차마 걸지 못하겠...) 포르노에서의 쓰리썸은 여여남이 메이저인데, 블로그 주인(여성)은 그게 너무 보기 심심하다며(...) 남남여가 더 다채롭고 남자들도 즐겁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친구(남성)들은 그게 훨씬 "하드코어"한 장르라고 이야기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블로그 주인은 남남여 상황에서 그 여성은 과연 즐거울까? 하고 의문을 표하지요.
위 논문에서도 남성들만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라는 것이 아쉽네요. 실제 쓰리썸을 경험한 여성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김영하의 <퀴즈쇼>에서 여주인공이 억지로 하다가 화내고 나오는 장면도 갑자기 떠오르는데 이것도 결국 남자 작가고...(시무룩)

호모소셜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이론적 관점에 따라 좀 다를 듯해유. 위 저자들이야 앤더슨이 주창한 호모히스테리아의 약화라는 점에서 상황을 바라보지만, 링크해주신 우에노 치즈꼬나 이브 세즈윅의 관점 또한 연결 가능한 듯해요. 물론 제가 아직 두 학자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어 가타부타 말은 못 하겠지만요 ;ㅅ;

네네, 저도 본문을 읽으며 그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룸쌀롱 접대 문화는 술/노래/섹스가 얽힌 가상의 유대감? (관련해서 예전에 용어를 봤었는데, 10년 전이라 기억이 안 나네요ㅠ) 같은 것이라,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루트와는 차이가 있어요. 논문에서는 이미 형성된 유대가 남남여 쓰리썸 참여의 필수조건인 것으로, 그리고 연구참여자들의 경험은 미소지니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섹스에 참여하는 것이 (성별불문) 집단 간 유대감 형성의 도구로 쓰인다는 점이 미소지니 혹은 구조적인 남녀... 더 보기
네네, 저도 본문을 읽으며 그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룸쌀롱 접대 문화는 술/노래/섹스가 얽힌 가상의 유대감? (관련해서 예전에 용어를 봤었는데, 10년 전이라 기억이 안 나네요ㅠ) 같은 것이라,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루트와는 차이가 있어요. 논문에서는 이미 형성된 유대가 남남여 쓰리썸 참여의 필수조건인 것으로, 그리고 연구참여자들의 경험은 미소지니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섹스에 참여하는 것이 (성별불문) 집단 간 유대감 형성의 도구로 쓰인다는 점이 미소지니 혹은 구조적인 남녀차별과 연결되어 룸쌀롱 문화가 탄생했다는 건 부정하기 힘들겠지요. 회사 차원에서 반공식적으로 조직하는 경우는 훨씬 줄었겠지만, 아직도 단체로 성매매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는 듯하더라고요. "유흥"이라는 단어로 프레이밍은 바뀌었지만요.

여성의 호스트바 소비도 관찰되고 있지만 이걸 단순히 남/녀 모두 성적 대상화에 참여한다는 식으로 묶어서 치부하는 건 생산성 있는 논의가 되지 못하겠고, 한국은 한국만의 맥락과 특수성이 있을테니 그 점을 민감하게 파고 들어가야 할 듯해요. 어디까지나 연구할 수 있다면요... 제 전공은 아니니까(?) 다른 분들의 노력을 응원해봅니다 ㅋㅋ

성적인 즐거움 보다는 참여하는 동성과의 유대 때문에 쓰리썸을 한다. 라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룸싸롱을 위시로한 유흥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적인 즐거움은 1:1일 때에도 합이 맞지 않으면 즐겁지 않을 수도 있는데, 2:1에서 얼마나 합이 맞을지도 궁금하기는 합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32825

저도 딱 떠올랐어요. 성 접대와 호모소셜... 위의 기사는 지금 막 대충 찾아낸 거지만요ㅋㅋ

남남여에서 남남끼리의 유대감이 있다는 게 제게도 흥미롭네요.
근데 그럼 거기서 여자는 어떤 즐거움을 느끼는지가 궁금하고..
여여남에서 여여끼리도 유대감이 있는 건가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남성 간의 유대감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나라 룸쌀롱 접대 문화... 같은 게 생각나네요. 제가 경험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위계질서 강화나 집단 유대감 형성 등의 목적으로 성 접대를 단체로 가던 기업 문화(?)가 이런 측면에서 해석될 여지가 있나 싶습니다. 누군가 이런 것도 연구해주면 재미있겠네요. 물론 이 문화 자체는 여성 입장에서 끔찍한 것이 맞습니다. (구매/판매자 성별이 일방적인 측면 + 접대하는 직급으로 절대 올라갈 수 없다는 측면 등등)

사회에서 섹슈얼리티, 젠더, 친밀감 등을 어떤 식으로 묶어서 구성하고, 사람들이 그 속에서 어떻게 감정사회화를 이루는가는 개별 사회 혹은 문화권 별로 차이가 나니까요. 물론 포르노그라피의 유통이 전세계적 규모로 일어나지만, 실제 사람들이 상호작용하는 대면적 레벨에서는 각 사회에서 무엇을 정상으로/비정상으로 구분하는가가 강하게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으니... 그래서 위 연구는 "영국"이라는 맥락 혹은 서구 백인 사회의 성해방 운동 등과 묶어서 살펴봐야 해요. 본문 배경에서도 성적 행위를 소비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라든지, 섹스를... 더 보기
사회에서 섹슈얼리티, 젠더, 친밀감 등을 어떤 식으로 묶어서 구성하고, 사람들이 그 속에서 어떻게 감정사회화를 이루는가는 개별 사회 혹은 문화권 별로 차이가 나니까요. 물론 포르노그라피의 유통이 전세계적 규모로 일어나지만, 실제 사람들이 상호작용하는 대면적 레벨에서는 각 사회에서 무엇을 정상으로/비정상으로 구분하는가가 강하게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으니... 그래서 위 연구는 "영국"이라는 맥락 혹은 서구 백인 사회의 성해방 운동 등과 묶어서 살펴봐야 해요. 본문 배경에서도 성적 행위를 소비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라든지, 섹스를 생식과 분리해서 오락적인 관점에서 인식하는 것이라든지 등을 짚었지요.

말씀하셨듯이 한국에서 일어나는 쓰리썸은 또 다르지 않을까 싶네요. 이건 제가 경험해본 영역이 아니라 뭐... 온라인을 통해 모집되는 방식이 일반적이라면 위에서 언급한 "아는 사람과 하기를 원한다"는 한국 맥락에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건 오히려 "아는 사람"에게서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리스크와, 모르는 사람과 참여하는 리스크 중에서 전자가 더 크다는 이야기라고 이론화를 할 수 있겠고요.

그와 별개로 친밀한 관계, 독점욕, 섹스를 통한 감각적 경험의 누적 등이 강한 연관이 있다 느끼기는 해요. 제가 다루는 많은 이야기들이 사회문화적 구성을 이야기하지만, 신체에서 연결되는 생물학적/심리학적 기저를 아예 무시하는 건 허랑한 일이니... 이미 오래 전 보울비가 애착의 형성과 스킨쉽의 관계를 연구했듯이요.

다만 그걸 사랑에 어떻게 연결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인데, 폴리아모리 논문 소개할 때 관련된 이야기들을 좀 더 풀어낼 듯해요 ㅋㅋㅋ

오우예 쓰리썸 이야후라 하지만 과연 쓰리썸의 실제가 어떨지는 모르겠어요. 섹스에 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경원시 되거나 판타지에 둘러싸이거나 둘 중 하나인데, 실제 우리가 성관계에 참여할 때는 상호 간 밀도높은 감정적 / 정서적 / 신체적 교류를 나눈다 생각하거든요. 한 사람과 제대로 하려해도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데 어떻게 여럿이서 하지? 이런 생각도 드네요.

흠 읽으면서 드는 생각 중 하나는 어느사회든 섹스가 일정정도 특별한 관계성 내지는 독점적 욕망을 함께 소화하는데 쓰이는 행위지만, 그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따라 차이도 있을 거 같아요. 내 연인은 독점적으로 나와 섹스해야한다는 그런게 더 강한가 아닌가.. 물론 다른 남/녀와 섹스하는 연인에게 어떤 문화권이든 분노를 표현하고 화를 내지만, 쓰리썸 같은 것 내지는 스와핑, 또는 마인드셋과 상관없이 성적 욕망에 대한 충족감을 위해 여러가지 행위를 하는 것(연인이 아닌 타인이 포함된)이 좀 더 받아들여지는 사회냐 아니냐에 따라 거부감도 다... 더 보기
흠 읽으면서 드는 생각 중 하나는 어느사회든 섹스가 일정정도 특별한 관계성 내지는 독점적 욕망을 함께 소화하는데 쓰이는 행위지만, 그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따라 차이도 있을 거 같아요. 내 연인은 독점적으로 나와 섹스해야한다는 그런게 더 강한가 아닌가.. 물론 다른 남/녀와 섹스하는 연인에게 어떤 문화권이든 분노를 표현하고 화를 내지만, 쓰리썸 같은 것 내지는 스와핑, 또는 마인드셋과 상관없이 성적 욕망에 대한 충족감을 위해 여러가지 행위를 하는 것(연인이 아닌 타인이 포함된)이 좀 더 받아들여지는 사회냐 아니냐에 따라 거부감도 다를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우리나라도 저런 집단성관계에 대한 욕망이 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지만(일종의 판타지로) 실제 저런 일이 일어나는 방식은 아주 음지에서 일어나고 성매매의 일환 또는 모르는 사람을 "선택"하게 하는 방식(인터넷으로 모집받는다든가)하고 익명성에 기대어 숨어 하는 일들이 많죠. 그만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 지지 않는거고..

개인적으로는 사람 마음이라는게 육체랑 아예 따로 놀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저런 것들이 어느정도 비교적 용인되는 문화란 분명히 다른 면에서 단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원래 자유라는게 다 그렇죠) 대부분의 비일상적 성적 욕망에 대한 해소가 열려있는 곳보다 열려있지 않은곳이 더 "위험한" 상황에서 욕망을 해소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저런게 낫나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렇게 쓰는 건 저는 유대감보다 오우예 쓰리썸 이야후 하고 읽어서 그렇겠죠?

* Douglas S. Massey, Jorge Durand, and Nolan J. Malone. 2005. "Principles of Operation: Theories of international migration."  C. SUAREZ-OROZCO, M. Suarez-Orozco, D. B. Qin-Hilliard (Eds.) The New Immigration: An Interdisciplinary Reader. London. Routledge. 21-33의 내용을 번역 및 요약한 내용입니다.
* 결론 부분 중 많은 부분은 이전 내용을 설명하기에 생략했습니다.
* 혹여나 내용이 연결이 잘 안 된다거나, 모순이 있는 부분이 있으면 어디까지나 정리한 제 자신의 부족함입니다. 댓글로 알려주시면 찾아보고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정리 도중에 본문에서 직접 인용을 하거나, 이론적 배경과 얽혀 있는 인용 외에는 적지 않았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원문을 확인하면서 추적해가시는 편을 추천합니다. 아래 정리 글에 인용된 몇몇 글들의 출처는 맨 아래 밝혀두었습니다.
* 해석은 했는데 맞는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용어, 그리고 중요한 내용은 원문을 병기했습니다.

Principles of Operation: Theories of International Migration
작동 원리: 국제 이주의 이론

Douglas S. Massey, Jorge Durand, and Nolan J. Malone

 대다수의 시민들과 관리들은 자신들이 국제 이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미국에 있는 멕시코 이민자들의 경우 이유는 명백해 보입니다. 미국은 부자이고, 멕시코는 상대적으로 가난합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이 정도의 격차가 나는 경우는 지구상에 다른 어디에도 없습니다. 수입의 차이는 생활 수준의 차이로 이어집니다. 평균적인 멕시코 사람이 북쪽을 향해 머리를 돌리고, 국경을 넘어, 미국에서 직업을 찾는다면, 그의 생활 수준은 극적으로 치솟겠지요. 설령 미국에서 최저임금을 받고 일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멕시코 사람이라면 미국으로의 이주를 원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걱정하듯이, 멕시코 이민자들은 미국으로 오는 것을 택합니다. 이주에 드는 비용과, 이주를 통해 얻는 비용을 계산하여 매년 수십만 명의 멕시코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멕시코와 미국 사이의 임금 격차가 계속되는 한, 남쪽 국경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이주의 인센티브가 크리라 믿습니다.


 멕시코와 미국 사이의 이주는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미국 시민, 정치인들은 일반적인 이민자, 특히 멕시코 이민자들에 대해 항상 불만을 가졌습니다. 대중적 정서는 광범위한 이념적 흐름에 발을 맞추어, 확장기이냐 축소기이냐에 따라 변동합니다. 이민 정책도 마찬가지로 수용과 배제를 오갑니다.


 다양한 이유로, 1980년대 후반은 배타적(restrictive; 제한적, 한정적)인 정서가 지배했습니다. 멕시코 이민을 줄이기 위해, 앞서 제시된 이해에 기반하여, 멕시코로부터 오는 비용을 늘리고, 이익을 줄여서 인센티브를 줄이고자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민자의 인센티브를 줄이기 위해 미국의 소득 수준을 낮추는데 한 표를 던질 정치인은 없고, 미국의 정치적 리더들은 멕시코 경제를 직접적으로 컨트롤할 수 없어 멕시코 임금을 올릴 수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제약 하에서, 미국 정책결정자들은 보다 다루기 쉬운(malleable; 영향을 잘 받는) 부분에 집중했습니다. 미등록 이주자의 고용을 범죄화 하고, 미등록 이주자를(때로는 등록 이주자들도) 공공 서비스에서 제외하고, 국경 순찰 요원들을 늘리고, 국경 관리에 자원을 더 투자했습니다. 이주를 통해 얻는 이익을 줄이고, 이주에 들어가는 비용을 늘려 멕시코인들의 이주를 막고, 본국으로 돌려보내고자 했지요.


 이러한 방안은 잘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정책이든, 정책에 기저에 깔린 가정이든 무언가 잘못되어 있었지요. 정책이 끼친 영향은 거의 없었고, 정책의 결과는 꼬인 채로 나타났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작금의 정책이 이주에 대한 협소한 개념화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대 이주의 실재는 단순히 비용-이익의 계산 보다 한층 더 복잡하지요.


 국제 이주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기본적인 질문에 직면해야 합니다. 1) 송출국 사회에서 나가는 이민(out-migration)을 촉진하는 힘은 무엇이고, 이것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What are the forces in sending societies that promote out-migration, and how do they operate?) 2) 수용국 사회에서 이주 노동력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내는 힘은 무엇이고, 이것은 어떻게 기능하는가? (What are the forces in receiving societies that create a demand for immigrant workers, and how do they function?) 3) 국제이주를 통해 이러한 힘에 응답하는 사람들의 동기, 목표, 열망은 무엇인가? (What are the motivations, goals, and aspirations of the people who respond to these forces by migrating internationally?) 4) 이주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서, 수용국 사회와 송출국 사회를 연결하는 사회적 경제적 구조는 무엇인가? (what are the social and economic structures that arise in the course of migration to connect sending and receiving societies?) 이주를 단순히 비용-이익 상의 결정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세 번째 질문에만 답하고, 가능한 여러 이주 동기 중 일부만 알려줍니다.

왜 사람들은 이주하는가?

 앞에서 시민들과 입법자들의 공유했던 내용은 신고전주의 경제학(neoclassical economics)이라는 이론적 틀과 일치합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국제 이주는 노동 수요/공급의 지역적 불일치에서 기인합니다. 자본에 비해 많은 노동력을 지닌 국가는 낮은 임금을, 반면에 자본에 비해 제한된 노옹력을 지닌 국가는 높은 임금을 보입니다. 이 국제적인 차이는 낮은 임금 국가의 노동자들이 높은 임금 국가로 이동하게 만듭니다. 이동의 결과, 낮은 임금 국가에서 노동 공급은 줄어들고 임금은 오르며, 높은 임금 국가에서는 반대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균형 상태에서 국제적 임금 격차는 국제 이주의 금전적, 심리적 비용을 반영합니다.
 이러한 거시 이론은 의사 결정의 미시경제적 모델을 수반합니다. 합리적 개인은 국제이주로부터 나타날 실질적인 총 수익을 기대하고, 비용과 이익을 계산하여 이주를 택하리라는 것입니다.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와 유사한 점이 있지요. 사람들은 삶의 초창기에 교육에 투자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이후에 높은 수입의 형태로 결실을 수확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합리적 개인이 이동에 투자하여 바꿀 수 있는 개인적인 특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주자들은 주어진 자신의 능력 하에서, 보다 생산적일 수 있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장소로 가고자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이동 비용부터, 언어/문화적 적응에 이르는 특정한 투자가 필요하지요. 신고전주의 이론에 따르면, 이주자들은 다양한 지역 각각을 이동할 때 드는 비용과 이익을 고려하여, 순수입이 극대화 되는 곳으로 향합니다.


 이론적인 개념을 이용하여 순수입을 계산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목적하는 국가에서 기대되는 수입에 그곳에서 직업을 획득할 가능성을 곱하여 목적 국가에서의 기대 수입을 계산합니다. 여기에서 마찬가지 방식으로 원래 국가에서의 기대 수입을 계산하고, 둘을 뺍니다. 한 개인이 지니는 향후 기대 노동 연도에 따라, 이 둘의 차이를 매년 합산하는데, 이 때 현재 수입이 미래 수입에 비해 효용이 더 크다는 점을 감안하여 미래 수입은 감산합니다. 이 합산에서 이동에 들어가는 추정 비용을 빼면 국제 이주를 통해 기대되는 순수입이 나옵니다.


 하지만 다양한 변칙적 사례들이 제시하듯이, 이주의 동기는 이러한 비용-이익 계산을 넘어 있습니다. 신고전주의 이론 하에서, 이주는 임금 격차가 없으면 일어나지 않지만, 이러한 흐름은 종종 관찰됩니다. 더하여, 만약 이동을 막는 법적 장벽이 없다면, 이주는 두 지역 사이의 임금 격차가 제거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지만, 이주의 흐름은 종종 임금 격차가 사라지기 전에 종료되고는 합니다. 순환 이주(circular migration)라는 자주 관찰되는 패턴 또한 엄격한 신고전주의적 관점에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이민 행렬 또한 미등록, 등록을 가리지 않고 매년 수천에 달합니다. 만약 신고전주의 원리에 맞춰 일이 돌아간다면 왜 누군가는 해외로 잠시 동안 이주한 후, 최종적으로는 귀환할 것을 예상하며 집으로 송금할까요? 효용을 극대화하는 합리적 행위자라면 계속해서 미국에 있으면서 소비를 즐겨야 합니다. 하지만, 이민자들은 수천억에 달하는 돈을 멕시코로 보내고 고향을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이러한 다른 사례가 나타나는 이유는 생애 기간 내 기대 수익의 극대화가 국제 이주의 여러 동기 중 하나일 뿐이고, 반드시 가장 중요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은 여러 가지 가정들을 지니고 있으며(이를테면 상품/서비스 시장이 존재하고, 완전하며, 정보와 경쟁은 완전하다, 개인은 외생적인 취향을 지니며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 하고자 한다 등), 이 가정들을 통해 세상이 어떠할지에 대한 연역 추리를 해나갑니다. 물론 현실은 보다 복잡합니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이 가정하는 원리들은 그대로 작동하지 않지요. 특히, 설령 개인이 합리적이고,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시장에 원자화되어 진입하지 않고, 가족과 가구의 구성원으로, 때로는 더 커다란 공동체,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으로 진입합니다. 말인즉슨, 집합 전략(collective strategies)이 가능합니다. 때로 이 전략은 개인의 그것과 일치하기도 하고, 그 않기도 하지요.


 만약 우리가 가족과 가구들이 실패한 시장에 직면한 세계를 상상한다면, 노동 이주의 신경제학(New economics of labor migration)(Stark and Bloom, 1985)이라 불리는 새로운 이론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신고전주의 모델과 달리, 노동이주의 신경제학은 이주 결정이 고립된 행위자가 아닌 상호 연관된 사람들의 더 큰 단위(대개 가족, 가구이나 때로는 전체 공동체도 가능) 내에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이러한 단위 내에서, 사람들은 단지 기대 수익을 개인적으로 극대화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보험, 신용, 자본 시장의 실패를 집단적으로 극복하고자 합니다.


 선진국에서는 사적 시장이나 정부 프로그램이 가구가 지닌 물질적 안녕의 위기를 관리합니다. 실업 급여나, 복지 프로그램 등이 대표적이지요. 멕시코 같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나라에서는 보험 같은 시장은 잘 발달되어 있지 않고, 정부도 보조금을 지급하여 격차를 베꾸려는 입장에 있지도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멕시코 사람들은 다른 북아메리카 사람들에 비해 가난할 뿐만 아니라, 더 위기에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만약 사회가 원자화 된 개인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멕시코 사람들은 이러한 위험에 즉각적으로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멕시코 사람들은 개인으로 살아가지 않고 시장에 선행하는 강력한 가족 유대로 묶여, 가구 내에서 살아갑니다. 개인과 달리 가구는 생산 자원(productive resource)의 배분을 다변화 하여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노동입니다. 투자자가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듯, 가구들도 구성원들을 다양한 노동 시장으로 보내 위기를 다각화합니다. 아내나 어린 자식이 지역 경제 내에서 일하는 동안, 딸이나 큰아들은 도시로, 아버지는 외국으로 가서 일하는 식으로요. 각 노동 시장 간의 관계가 관련성이 약하거나, 부적인 상관관계를 지닌다면, 가구는 이러한 다각화를 통해 위기 관리가 가능해집니다. 본국의 사정이 악화되는 경우, 가구는 해외 이주자가 보내오는 송금을 대안적인 수입으로 이용할 수 있지요. 개발도상국에는 자본이나 신용 시장도 약하거나 없는데, 이 경우에도 국제 이주는 합리적인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가구는 대출을 받는 대신, 구성원 중 한 두명을 해외로 보내 짧은 시간 내에 저축을 할 수 있습니다.

의사 결정의 맥락    

 개인과 가구는 대개 언제나 광범위한 사회 체제 내에 배태되어(embedded) 있습니다. 친족 네트워크, 계급 위계, 에스닉 및 인종 집단, 직업 영역, 산업 및 관료 기구 등과 같은 사회 체제는 그 자신의 조직과 가치를 지닙니다. 사회과학자들이 반복해서 보여주듯이, 사회 구조 내에서 개인의 지위는 결정이 이루어지는 맥락을 결정합니다. 개인의 구조적 지위는 한 사람의 취향, 선호, 가치, 정보, 학습, 자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특정한 행동을 고려할 때 예측되는 비용과 이익을 결정합니다. 사회의 구조적 변화는 미시 수준에서의 결정이 이루어지는 맥락을 변화시켜 국제 이주가 일어날 확률을 높이고, 낮추는데 확연한 영향을 미칩니다.


 사회 경제적 구조는 보통 특정 가족 혹은 공동체 내에 있는 행위자에게 외재하는 거시 수준의 강력한 힘을 통해 변화합니다. 사회과학자들은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여 국제 이주에 대한 구조적 이론(structural theories)을 발전 시켰습니다. 임마누엘 월러스타인(Immanuel Wallerstein, 1974)의 유명한 세계 체제 이론(World systems theory)에 기반하여, 학자들은 글로벌 시장의 변화하는 범위와 구조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 틀 안에서 보면, 주변부의, 시장이 없는, 시장 이전 사회로의 시장 확장이 이주에 용이한 유동하는 인구(mobile population)를 만들어 냈습니다.


 더 많은 이윤과 부를 창출하고자 하는 열망에 따라, 선진국의 큰 회사 주인과 관리자들은 땅, 원자재, 노동, 시장을 찾아 세계 경제의 주변부로 향합니다. 이주는 시장 확장과 침투(penetration) 과정에서 일어나는 파열(disruption)과, 탈구(dislocation)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입니다. 토지, 원자재, 노동이 시장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면서, 이주의 흐름이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농부가 먹고 살기 위해 농사를 짓다가, 내다 팔기 위해 농사를 짓게 된다면 경쟁을 위해 토지 지분을 통합하고, 생산을 기계화하고, 환금작물을 산업적인 생산 요소들을 적용해야 합니다. 토지 통합은 공동의 토지 이용권에 기반한 전통적인 임대체제를 파괴 시키지요. 자동화는 노동에 대한 필요를 줄이고, 미숙련 농업 노동자들은 해고됩니다. 환금 작물이 주요 작물을 대체하면서 전통적인 사회 경제 관계는 약화됩니다. 근대적 요소의 사용은 작물의 생산량을 늘리고, 단위 가격을 떨어트려서 소작농들을 몰아냅니다. 이러한 모든 힘들은 유동적인 노동 인구의 형성에 기여합니다.


 선진국의 필요에 맞추어 원재료를 추출하는 것은 임금 노동에 기반한 새로운 산업 방식을 필요로 합니다. 이전에 소작농이었던 사람들이 임노동자가 되는 것은, 호혜적이고 고정된 역할 관계에 기반했던 전통적인 사회 조직을 약화시킵니다. 대신에 개인주의, 사익, 변화, 적응이라는 새로운 개념에 기반한 초기 노동 시장이 형성됩니다. 다국적 기업은 가난한 나라로 진출하여 공장을 세우고, 낮은 임금을 이용하는데, 공장 노동자에 대한 수요는 지역 노동 시장을 가오하하고, 전통적인 생산 관계를 더욱 약화시킵니다.


 주변부 지역으로 외국 공장이 들어오는 것은 전통적인 경제를 다른 방식으로 약화시킵니다. 그 나라에서 생산된 제품과 경쟁하는 제품을 생산하고, 남성에게 적절한 공장 기반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노동력을 여성화합니다. 여성을 산업적 노동과 근대적 소비에 적합하게 사회화 하면서, 이러한 필요에 부응하는 직업은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는,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뿌리뽑힌 인구의 탄생이자, 이주할 가능성이 높은 인구의 탄생이지요.
 글로벌하게 작용하여 주변부 지역에서 이주자를 만들어낸 경제적인 과정은 동시에 이주자들이 선진국으로 향하는 과정을 손쉽게 만들었습니다. 물건을 선적하거나, 기계를 배송하거나, 원자재를 추출 및 수출하고, 해외 공장을 관리하는 등의 작업을 위해 중심 국가의 회사들은 자신들이 투자하는 주변부 국가와의 교통, 통신망을 건설하고 확장했습니다. 이러한 연결은 물건, 재화, 정보, 자본의 이동을 촉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부 국가에서 중심부 국가로 향하는 인간의 흐름 또한 촉진하였습니다. 글로벌한 투자에는 필연적으로 교통, 통신 기반 시설 구축이 뒤따른다는 점을 생각하자면, 국제 이주 노동은 대개 재화와 자본의 국제 이동과 평행한다 볼 수 있겠지요.


 경제적인 세계화는 또한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사이에 문화적인 연결고리도 만들었습니다. 때로 이 문화적 연결망은 이전의 식민 관계를 통해 오래 전부터 설정되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식민지 역사가 없더라도, 경제적 침투의 문화적 결과는 현저합니다. 멕시코는 스페인의 식민지였지만, 미국 문화에 더 익숙하고 이를 선호합니다. 미국이 지니고 있는 경제적인 헤게모니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노출된 문화적 연결고리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보다는 상대적으로 미국으로의 이주를 선호하게 만듭니다.


 세계 경제를 관리(manage)하는 것은, 은행, 금융, 행정, 전문 서비스, 연구가 집중되어 있는 몇몇 도시 지역입니다. 미국의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러스, 유럽의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 태평양 연안의 도쿄, 싱가포르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도시 내에서, 부는 집중되어 미숙련 노동자들(웨이터, 가사 노동자, 호텔 근로자, 정원사 등)에 대한 큰 수요를 만들어냅니다. 동시에 중공업은 해외로 이전하고, 첨단 기술 제조업이 성장하고, 건강이나 교육 같은 서비스업이 확장되면서 모든 노동은 두 갈래로 나누어진(bifurcated) 노동 시장을 만들어 냅니다. 이 시장은 직업적 위계 하에서 최상위에 위치한 노동자와, 최하위에 위치한 노동자에 대한 강한 수요를 지닙니다. 다만 두 수요 사이에는 관계가 약합니다.

이주자에 대한 수

 글로벌 시티 내에서 노동 시장의 분기는 세계 체제 이론에 의해 예측되었고, 분절 노동 시장 이론(Segmented labor market theory)에도 들어맞습니다. 마이클 피오레(Michael Piore, 1979)는 국제 이주는 상대적으로 미숙련 노동자에 대한 상대적으로 영속적인 수요에서 기인하였고, 이 수요는 선진국의 경제 구조 내에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 했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이주는 송출국의 유출 요소가 아닌, 수용국 사회의 유입 요소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노동력에 대한 본질적인 수요는 선진 산업 경제가 직면하는 네 가지 근본적인 문제에 원인을 둡니다.


 1) 첫 번째 문제는 구조적 인플레이션(structural inflation)입니다. 임금은 단지 수요와 공급 조건만을 반영하지 않고, 특정한 직업에 내재한 지위, 특혜, 사회적 질을 고려(confer)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임금이 사회적 지위를 반영해야 한다고 믿고, 직업적 지위와 임금 사이의 관계에 대해 훨씬 엄격한 관념을 지닙니다. 결과적으로, 사용자가 제공하는 임금은 노동자의 공급 변화에 자유롭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비공식적인 사회적 기대와, 공식적인 제도적 기제(이를테면 노조 계약, 공무원 서비스 규칙, 관료적 규제, 인적 자원 계급화)는 임금이 사람들이 인식하는 특혜 및 지위의 위계와 일치하도록 만듭니다.


 만약 사용자가 미숙련 일자리에 쓸 노동자를 직업 위계의 맨 아래에서 끌어들이고자 한자면, 단순히 임금만 끌어올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정의된 지위와 보상 사이의 관계를 뒤흔드는 일입니다. 만약 가장 아래에서 임금이 오른다면, 사용자들은 직업 위계의 다른 수준에서도 임금을 올리라는 강력한 압력에 직면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기본 수준(entry-level) 노동자들을 유인하기 위해 임금을 올린다면, 그 비용은 이 노동자들의 임금 이상입니다. 따라서, 구조적 인플레이션 - 사회적 기대와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직업 위계에 비례하여 임금을 올려야 할 요구(The need to raise wages proportionately throughout the job hierarchy to maintain consistency with social expectations) - 은 사용자들이 더 쉽고 싼 해결책인 이민자 수입을 택하게 만들 강할 인센티브를 제공합니다.


 2) 직업 위계에 본질적인, (노동)동기에 대한 사회적 제약(social constraints on motivation) 또한 싸고 유연한 노동력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하지 않고, 사회적 지위를 축적하기 위해서도 일합니다. 직업 위계의 맨 아래에서는 극심한 동기 문제가 나타나는데, 왜냐하면 여기에는 유지할 만한 지위도 없고, 위로 올라갈 방안도(avenues)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회피 불가능하며, 그 이유는 노동 시장에서 이 바닥은 결코 사라지지 않기 떄문입니다. 기계화를 통해 사람들이 피하는 직업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이전에 직업 사다리에서 바닥의 바로 위에 있던 직업이 새로운 바닥이 될 뿐입니다. 고용주들이 원하는 것은 바닥 수준의 직업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는 노동자입니다.


 이주자들은 이러한 필요를 다양한 측면에서 만족시킵니다. 특히 이주 경력의 초기에 위치한 사람이라면 더더욱이요. 이주자들은 대개 돈을 벌기 위해 외국에서 일을 시작합니다. 문제를 해결한다든지, 고향에서의 지위를 개선한다든지 하는(이를테면 새로운 집을 짓거나, 땅을 사거나 등) 특정한 목표를 위해 돈을 법니다. 더하여,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사회의 생활수준 차이 때문에 해외의 낮은 임금은 송출국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후하게 비추어집니다. 비록 이주자들이 외국에서 갖은 직업이 낮은 지위가 낮다는 점을 깨달을지 몰라도, 이주자는 그 자신을 수용국 사회의 부분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주자는 고향 공동체 내의 지위 체계 내에 배태되어 있고, 송금을 열심히 하면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구매할 수 있습니다.


 3) 이주자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또한 노동과 자본의 이원성(Duality of labor and capital)로부터 기인합니다. 자본은 생산에서 고정 비용이고, 낮은 수요 때문에 유후 상태로 있을 수는 있지만, 실직 상태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자본 소유자는 자본의 실업 비용을 감내해야 하지요. 반대로, 노동은 생산에서 가변 비용입니다. 수요가 하락한다면 해고될 수 있지요. 따라서 노동자는 그 자신의 실업 비용을 감내해야 합니다. 따라서 가능한 경우라면 언제든지, 산업가들은 수요에서 안정적이고 영구적인 부분을 찾고, 이것을 자본의 발전을 위해 유보합니다. 그리고 수요에서 가변적인 부분은 노동을 더하거나, 줄여서 맞추고자 합니다. 이 이중성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구분을 만들어내고, 노동의 분절화를 야기합니다.


 자본 집약적 1차 영역의 노동자들은 안정적이고, 숙련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좋은 도구와 장비를 가지고 일합니다. 고용주들은 그들의 훈련과 교육을 통해 인적 자본에 투자하도록 압박 받습니다. 1차 영역의 직업은 복잡하고,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요구합니다. 특정한 직업이나, 회사에 구체적인 지식들이 집약됩니다. 1차 영역의 노동자들은 또한 노동조합을 구성하고, 매우 전문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노동 계약을 통해 고용주들은 휴직/해고 비용의 일부를 분담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1차 영역의 노동자들은 떠나 보내기에는 비싸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본과 비슷합니다.


 노동 집약적 2차 영역은, 반대로, 임금이 낮고, 불안정한 직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을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고, 그에 따른 비용은 고용주들에게는 없거나, 거의 없지요. 경기가 하강할 때 고용주들은 이러한 노동자들을 해고합니다. 이러한 이중성은 따라서 분절화된 노동 시장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낮은 임금, 불안정한 지위, 합리적인 직업 전망의 부재 등은 본국의 노동자들을 2차 시장으로 끌어들이기 어렵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대신에 1차, 자본 집약적 영역으로 몰립니다. 2차 노동 시장 내의 미달을 채우기 위해, 고용주들은 이민자들에게로 관심을 돌립니다.


 동기 문제, 구조적 인플레이션, 경제적 이중성은 특정한 종류의 노동자에대한 수요를 만들어냅니다. 나쁜 환경, 낮은 임금, 높은 불안정성, 낮은 개선 기회를 지닌 직업에서도 기꺼이 일하려는 사람 말이지요. 과거에는 여성, 청소년, 이촌향도 노동자들이 이러한 수요를 채웠습니다. 역사적으로 여성들은 첫 번째 아이를 낳은 이후, 보다 드물게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이후 노동 시장에 참여했었다. 그들은 1차적인 생계부양자가 아니었으며, 주된 사회적 정체성은 딸, 아내 혹은 아내였습니다. 낮은 임금과 불안정성을 기꺼이 견뎠고, 그 이유는 자신들의 직업을 일시적이고, 보조적인 수입으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가족 내에 위치한 그들의 주된 사회적 지위는 앞선 직업적 위치를 통해 위협받지 않았지요.


 마찬가지로, 청소년들도 역사적으로 종종 용돈을 벌거나, 경험을 언거다, 다른 직업 역할을 경험하기 위해 노동 시장에 들어오거나, 나가고는 했습니다. 청소년들은 "죽을 운명인" 지금 직업을 문제로 보지 않았는데, 어차피 학교를 졸업하고, 경험을 얻고 자리를 잡고 나면 미래에 더 나은 직업을 가지리라는 기대가 있어서였지요. 더하여, 청소년들은 1차적인 사회적 지위를 부모로부터 받지, 직업에서 받지는 않습니다. 노동은 용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며, 용돈을 가지고 옷이나 차, 음악을 사서 동료들 사이에서 지위를 높이는 것이 목표이지요.


 마지막으로, 선진국의 농촌 지역을 오랜 세월에 걸쳐 산업 도시에 안정적인 저임금 노동자를 제공했습니다. 사회 경제적으로 후미진 곳에서 역동적인 도시로 이동하면, 목적지에서 어떤 환경에서 사는지와는 상관없이 상향 이동을 한 감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도시 내에서 가장 하찮은 직업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제공하는 집, 음식, 소비재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 가난한 이주민에게 세상에서 한 걸음 도약한 것과 같았습니다.


 4) 하지만, 선진 산업 사회에서 이러한 집입 수준 노동자들의 세 원천은 네 가지 근본적인 인구학적 경향으로 인해 극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1] 여성 노동 참여의 증가에 따라 여성의 직업은 수입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기 위한 경력으로 바꾸었습니다. 2] 이혼율의 증가는, 여성의 취업을 1차적인 부양의 원천으로 만들었습니다. 3] 출생율의 감소와 공교육의 확장은, 노동 시장에 진입하는 청소년 세대를 줄였습니다. 4] 사회의 도시화는 도시를 향하는 새로운 이주자의 잠재적 원천이었던 농촌 공동체를 제거하였습니다. 진입 수준 노동자에 대한 구조적인 수요와, 이러한 노동자의 제한된 국내 공급 사이의 불균형은 선진국 내에서 근본적이고, 오래 지속될 이주민에 대한 수요를 발생시켰습니다.

왜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주하는가?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이주하지만, 국제적인 이동을 시작하게 하는 힘과 영속시키는 힘은 다릅니다. 이주 과정에서 새로운 조건이 나타나 추가적인 이동의 가능성을 높이고, 국제 이주가 시/공간을 가로질러 영속하게 만듭니다. 이 영속에 대한 연구들은 사회적 자본 이론(Social capital theory)이라는 틀의 아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피에르 부르디외에와 로익 바캉(Pierre Bourdieu, Loic Wacquant, 1992: 119)에 따르자면 "사회적 자본은 실질적 혹은 가상적인 자원의 총합이며, 이것은 개인이나 집단에게 누적됩니다. 사회적 자본은 공동의 면식이나 인식을 통해 거의 제도화 된 관계의 지속적인 연결망을 소유함으로써 형성됩니다.(Social capital is the sum of the resources, actual or virtual, that accrue to an individual or a group by virtue of possessing a durable network of more or less institutionalized relationships of mutual acquaintance and recognition)" 사회적 자본의 핵심적인 특징은 전환가능성(convertibility)입니다. 사회적 자본은 다른 사회적 혹은 경제적인 이익으로 변형 가능합니다.


 사람들은 대인관계 연결망이나 사회적 제도 속에 소속되어서 사회적 자본에 접근합니다. 그리고 사회적 자본을 사회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개선하기 위해 다른 형태의 자본으로 전환합니다. 이주자 연결망은 해외로 이주를 고려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회적 자본입니다. 이것이 동향 모임, 친구, 친족 관계의 호혜적인 연결을 바탕으로 고향과 목적지에서 이주자, 과거 이주자, 비이주자 사이를 연결하는 인간 관계의 유대(interpersonal ties)를 형성합니다. 이 연결은 국제 이주의 가능성을 높입니다. 왜냐하면 연결망을 통해 이주의 비용과 위험을 높이고, 이주의 순 기대 수입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회적 자본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변화하고, 이를 통해 행동을 촉진할 때 형성된다(Social capital... is created when the relations among persons change in ways that facilitate action(Coleman 1990: 304)"는 금언과 궤를 같이하여, 이주는 그 자체로 변화의 촉매입니다. 친구, 친족 사이의 일상적인 유대는 해외 이주를 고려하는 사람에게 딱히 이익을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연결망에 있는 한 사람이 이주를 하게 된다면, 이 연결망은 해외 이주에 접근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됩니다. 각각의 이주 행위는 이주한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며, 따라서 그 사람의 이주 가능성을 높입니다.


 새로운 땅을 찾아 처음 이주한 사람은 활용할 수 있는 어떠한 사회적 유대도 없었고, 그들에게 이주는 값비쌉니다. 특히 해외로의 미등록 이주인 경우에는 더더욱. 하지만 첫 번째 이주자가 떠난 이후에는, 본국에 남아있는 친구나, 친지들에게 이주의 잠재적인 비용은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친족과 친구 관계 구조의 특성 때문에, 각각의 새로운 이주자는 목적지와 사회적 유대를 지닌 인간 집단을 확장시킵니다.


 일단 국제 이주가 시작되면, 부유한 나라로 향하고자 하는 방법을 찾는 수많은 사람과, 공식적으로 주어지는 제한된 사증(visa)의 공급 사이에서 불균형이 생겨납니다. 사적 기구와 자원봉사 조직은 이 증가하는 불균형이 만들어낸 수요를 만족하고자 나타납니다. 선진국에서 이주민을 막고자 세운 장벽이 만들어 낸 불균형 속에서 사업가들은 돈을 벌고, 돈을 더 벌기 위해 국제 이주를 촉진하며, 이주 서비스를 위한 암시장을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지하 시장이 범죄나 착최가 일어나기 쉬운 환경을 조성하기에, 인권 기구 또한 합법적, 미등록 이주자 모두의 처지를 개선하고 권리을 확립하기 위해 나타납니다. 이러한 조직은 이주자에게 또다른 사회적 자본이 됩니다. 제공하는 서비스의 범위는 밀수입이나, 밀입국, 서류 위조 같은 것들부터 정보 및 조언, 신용, 쉼터 제공까지 다양하지요.


 사회적 자본이 시간이 지나면서 누적되고, 국제 이주를 영속화하는 방식은 이주의 누적적 인과관계(cumulative causation of migration)(Myrdal, 1957)라 불리는 보다 광범위한 과정의 구체적인 사례(manifestation)입니다. 이주를 야기하는 원인은 누적적이게 되는데, 그 이유는 각각의 이주 행위가 이후의 이주 결정이 이루어지는 사회적인 맥락을 바꾸고, 따라서 추가적인 이동의 가능성을 증가시키기 때문입니다. 한 공동체 내의 연결망 결속의 수가 특정한 문턱에 다다르면, 이주는 자기 영속적으로 변합니다. 각각의 이주 행위는 이주를 유지하는 사회적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물론, 제한된 인구 상황에서, 누적적 인과관계 과정은 무한히 계속되지 않습니다. 만약 이주가 충분히 오래 지속된다면, 연결망은 종국에는 특정한 공동체 내에서 포화 상태에 도달할 것입니다. 점점 더 공동체 구성원들이 해외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실질적으로 고향의 모든 이들이 해외에 살거나, 해외 거주 경험이 있는 사람들과 연결됩니다. 연결망이 이 정도로 높은 수준으로 정교화되면, 새롭게 이주자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이주의 비용이 급격히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주는 성장의 동력을 잃게 됩니다. 한 공동체 내의 이주 보급은 상위 한계에 도달하고, 이주 경험은 널리 확산되어 잠재적인 새 이주자의 재고는 줄어들고, 새 이주자들은 여성, 자녀, 그리고 노인들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만약 이주가 충분히 오래 이어진다면, 고향 땅에서의 노동 부족과 임금 상승은 나가는 이민에 대한 압력을 약화시키고, 이주 노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줄어듭니다. 국가 수준에서 관찰할 때 이러한 경향은 찾아보기 힘든데, 새로운 공동체가 이주의 흐름에 계속해서 포합되기 때문입니다. 이주의 역사가 오래된 곳에서 나가는 이민의 비율이 줄어들 때, 새로운 장소들이 초국적인 순환(transnational circuits)에 이끌리고, 그 장소의 이주 비율이 상승합니다. 결과적으로, 한 국가 전체의 총 유출은 이주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확산됨에 따라 계속해서 증가합니다.

마무리

본문에서 논의했던 이론들은 다양한 수준에서 집합적으로 작동하는 인과 기제이며, 다양한 설명들은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개인이 완전히 비용-이익 계산에 근거할 수도 있고, 가구를 위해 위험을 최소화하고 자본이나 신용 장벽을 극복하고자 할 수도 있고, 개인과 가구 모두 국제 이주를 촉진하기 위해 사회적 자본에 의지할 수도 있고, 이주 결정이 일어나는 사회경제적 맥락이 국가와 국제 수준에서 작동하는 구조적 힘에 의해 결정될 수도 있고, 이주 그 자체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론적 구성물에 대한 종합적인 접근이 적합합니다.  


 대부분의 송출국에서 나가는 이민이 시작되는 초창기에, 흐름을 설명하는 지배적인 요인은 자본주의 침투, 시장 실패, 연결망 구성, 누적적 인과관계의 효과입니다. 하지만 해외 이민이 높은 수준에 도달하면, 국제 이주의 비용과 국제 이주가 야기하는 위기는 줄어들고, 이주는 점점 더 국제적인 임금 격차와 노동 수요에 의해 결정되게 됩니다. 개발도상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한다면 앞서 언급했던 시장 실패나, 임금 격차의 효과는 사라지고, 이주의 인센티브는 더 줄어듭니다. 만약 이러한 경향이 계속된다면, 그 국가는 궁극적으로는 선진국, 자본주의 경제로서 글로벌 경제에 통합되고, 이주의 변형(migration transition)을 겪게 됩니다. 노동력을 수출하는 국가에서, 노동력을 수입하는 국가가 되는 것이지요.

정리글에 언급한 일부 참고문헌들

Bourdieu, Pierre, and Loic Wacquant. 1992. An Invitation to Reflexive Sociolog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oleman, James S. 1990. Foundation of Social Theory.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Mydral, Gumanr. 1957. Rich Lands and Poor. New York: Harper and Row. 
Piore, ichael J. 1979. Birds of Passage: Migrant Labor in Industrial Societies.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Stark, Oded, and David E. Bloom. 1985 "The New Economics of labor Migration." American Economic Review 75: 173-78
Wallerstein, Immanuel. 1974 The Modern World System I: Capitalist Agriculture and the Origins of the European World Economy in the Sixteenth Century. New York: Academic Press.


읽고 나서 든 생각

1) 2005년에 엮인 책에 수록된 글이니 지금과는 10년 정도의 시차가 있네요. 아무래도 최근 이론들은 또 달라진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2) 우리는 이주를 소위 남쪽 국가에서 북쪽 국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 일어나는 이주를 보면 그 방향이 다양하게(남->남, 북->남, 북->북, 남->남) 일어납니다. 위 내용을 바탕으로 모든 이주를, 또 노동 이주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요.
3) 개인이 이주라는 결정을 내리는 배경에 있어, 개인이 외국에서의 삶에 대해 지니는 상상력은 생각보다 큰 힘을 발휘합니다. 본문에서 짚었던 문화적인 연결고리(Cultural Link)를 우리나라 상황에 적용하자면, 동남아시아의 한류 열풍을 통해 유학이나 결혼이주(물론 결혼/노동이주의 엄격한 구분이란 불가능하지만) 등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요. 또 이 부분에서는 K-Pop이나 한국 드라마의 주 소비 계층이 여성이라는 점을 바탕으로 젠더적인 부분도 고려해 볼 여지가 있을 듯합니다. 젠더적 의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또 최근 아시아 주변의 이주가 여성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4)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분절 노동 시장에 대한 마이클 피오레의 논의였어요. 저만 하더라도 이전까지지는 2차 노동 시장의 인력 수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2차 노동 시장의 노동 환경 및 임금 처우의 개선이 우선이라고 단순하게만 생각했거든요. 본문에서는 직업 위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자체가 자아내는 힘이 강력하며, 위계 자체는 사라지지 않으리라 주장하고 있네요. 생각보다는 훨씬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은 듯합니다.
    

헉... 제가 이전 댓글을 보지 못해서... 그래도 큰 관심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내용인데 환대해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헤헤. 캘리포니아 이주민이라면 한국계 이주민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실제로 책을 읽어보면 더 복잡한 기분이 들어요. 해외 유학생들이 한국 대학원 구조에 대한 가졌던 회의부터 시작해서, 한국에서는 난다긴다 했던 엘리트들이 영어 때문에 겪는 좌절감, 이후 진로에서 갈라지는 여러 경로들, 한국 학계로 돌아와 자리를 잡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해외와의 연결고리를 유지/강화하려는 모습까지요.

제가 이주에 관련해서 공부한 2개의 글을 올리면서 대부분 해외 글들을 번역했어요. 받아들이는 이민의 역사가 한국에서 짧아서 해외 논의에 의지해야 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기도, 이주라는 주제 자체가 개별 국가를 넘어선 ... 더 보기
실제로 책을 읽어보면 더 복잡한 기분이 들어요. 해외 유학생들이 한국 대학원 구조에 대한 가졌던 회의부터 시작해서, 한국에서는 난다긴다 했던 엘리트들이 영어 때문에 겪는 좌절감, 이후 진로에서 갈라지는 여러 경로들, 한국 학계로 돌아와 자리를 잡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해외와의 연결고리를 유지/강화하려는 모습까지요.

제가 이주에 관련해서 공부한 2개의 글을 올리면서 대부분 해외 글들을 번역했어요. 받아들이는 이민의 역사가 한국에서 짧아서 해외 논의에 의지해야 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기도, 이주라는 주제 자체가 개별 국가를 넘어선 활동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글로벌 지식장 내의 위계 구조가 여실히 반영된 것이기도 할 터에요. 당장 제 지도교수님도 김종영 선생님의 저 저작과 연이 있어요.

전 교수신문에 있는 저 인터뷰도 흥미로웠지만, 아래 나오는 댓글들도 흥미롭더라고요.

감정과 같은 것들은 쉽게 대체될수가 없으니까요. 오히려 고도의 학문과 정밀성이 필요한 의료가 먼저 대체될것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실 위계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좀 더 인상깊었습니다. 사실 노동시장에서, 이주문제와 관련된 것들을 배제하더라도, 위게가 미치는 영향은 꽤나 거대하니까요. 쟤도 얼마를 받는데 나는 왜 얼마.... 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말할순 없겠지만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댓글을 수정했어요. 스스로 정리가안되서 죄송죄송..
그렇지만, 여러가지 덧붙이고 싶은 생각들이 많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캘리포니아 이주민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사회학 관련 내용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교수신문의 지배받는 지배자 관련 인터뷰도 찾아읽게 되었는데요. 김종영 교수의 학벌이 또다른 racism 이라는 말 참 공감이 가는데요. 사회학관련글들이 좀 더 많아져서 racism 이나 사회적 차별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곳에서도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책은 못읽어보았지만 재밌는 토픽이네요. 다 아는 ...일반인들은 잘 이해하기 힘든 슬픈 현실을 살짝...이야기해준 것 같습니다.

검색해보니 책 관련 내용이 나오네요.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1072

“우리는 교수가 아니라 천민 … 배타적 인종차별주의 극복해야 학계 산다

저는 인공지능이나, 자동화에 대한 논의들을 보면서 이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직업 계층의 "바닥"이 소멸하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인간 인식 속에서 이 "바닥"은 소멸하지 않고, 새롭게 또 나타난다고 하니까요.

또한 글로벌 시티 논의에서 살짝 엿보이기는 했지만, 저숙련 일자리의 많은 수는 서비스 업이고, 감정노동이 중요한 부분이라 기계가 쉽사리 대체하지는 못할 거예요.

아시아 내 이주의 여성화는 아시아 선진국이 공유하고 있는 재생산 위기 문제와도 연관이 되요. 지난 번 번역해 올렸던 "가사노동자 및 보모"나, 한국 맥락에서 더 부각되는 이주결혼여성들이 이 맥락과 얽혀있지요. "친밀한 관계(intimacy)" 를 기계를 통해 대체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아

한국에 와 있는 유학생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소위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최근 연구를 보면 드라마를 통해 만들어진 한국에 대한 인식이 한국으로 오도록 하는데 영향력이 커보이더라고요. 저 같은 겜덕후들은 "에이 한류 그까이꺼"하는 경우가 많은데, 문화적 영향력은 굉장히 큰 것 같아요. 이 부분에만 초점을 두어 집중적으로 조사하는 연구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요.

혹시 읽어보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여유 되시면 "김종영(2015)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을 읽어보시면 재미있으실 거예요. 엘리트 유학생들의 유학 이전 상상력부터, 실제 경험, 이후 생애경로를 따라가는 책이거든요

느낌적인 느낌이지만, 젋은 층에서 이민에 대한 열망(혹은 그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출되는 한국 현실에 대한 불만 혹은 절망)이 크다고 느껴요. 아직 한국에서 해외로 나가는 이민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은데, 언젠가 좀 더 공부해보고 싶은 거리이기는 해요.

"교육"은 중요한 이민 동기에요. 본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주판알을 튕겨 보았을 때 자신 세대에서는 수지가 맞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이민을 하는 사람도 많아요. 이 경우 향후 자녀 교육이 핵심적 요인이더라고요.

저는 역시 4번이....

재밌게 잘 읽었어요. 마지막 코멘트 중 3번이 역시 눈에 들어오네요.

저는 교육환경 및 복지 정책이 좋은 국가에 대한 환상이 있어요.
아쉽게도 실행까지는 어려울 것 같지만 그래도 꿈입니다 ㅠㅠ

무슨 글을 써야 여러분도 기뻐하고 행복해하시고 또 에도 도움이 될런지 솔직히 고민이 되네요

너무 가벼워서도 안될것이고, 너무 깊고 무거워서도 안될것이고...
너무 세간의 트렌드에 뒤쳐지거나 너무 혼자만 아는 분야의 얘기를 해서도 안될것 같고.

제가 지금 느끼는 티타임 게시판은 뭔가 약간 무거운 느낌이 드네요. 서로의 지식 경험을 뽐내는 느낌이랄까요

저는 솔직히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주로 하고 싶은데 그건 환영 받지 않을거 같기도 하고
알고 있는걸 적기에는 너무 전문 분야라서 동감해주실분도 거의 없을것이고

역시 저에게는 다른 게시판이 딱 마음이 편합니다 ㅎㅎ 에이 시옷님이 뭐 어때서요 ! 제가 걱정이지요 헤헤헤

꽃단장? 하고 기다리겠습니다 ㅎㅎ 근데 여친이 없어요 ......(먼 산을 보며 )

에구구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ㅜㅜ 얻어 가는것 만큼 저도 뭔가를 여러분들께 드리고 싶네요.

근데 그게 가능할런지 ㄷㄷㄷ 뭐라도 좋은거 있으면 올려보겠습니다 ㅋ_ㅋ

넹 탐라에서 자주 뵈어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한개 쓰신 것만두 대단하세요! 저는 한개도 부담스럽....

오오 스몰토크를 몰랐네요 저도 꼭 해볼게요 조언 감사합니다 ^ㅁ^ 괜히 실없어 보일까봐 자제한 측면도 있어요

300개도 쌉가능일듯!

셋째가면 따봉 100개 찍을 수 있읍니까

저 같은 사람도 글을 쓰니 걱정마세요!

따봉과 댓글은 내 일이 아니므로 어찌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나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정성껏 쓰고 목욕재계하고 기다리는 것
+ 따봉 많이 받는 건 출산이 짱입니당

짧으면 탐라, 길면 티타임, 짧아도 좋은 글은 티타임, 짧아도 티타임에 쓰고 싶으면 티타임...

자기 맘입니다 ㅎㅎ

저도 한개 쓰고 나서 못쓰고 있습니다 ㅎㅎㅎ. 스몰토크 타임라인에서 자주 뵈어용 !

저도 깊은 고민글을 빼고는(왜냐하면 개인적으로 이 사이트엔 저보다 배울 점도 많아보이고 현명하신 분들이 많이 계시는 거 같아 진지하게 조언 얻으려고)
저도 탐라에 주로 글을 자주 올립니다.
탐라 재밌어요 가벼운 스몰토크 재미있어요 ㅎ

오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 어렵지도 않지만 그리 쉬운것도 아닌듯 해요 ㅜㅜ

티타임 게시판 글쓰기버튼이 참 무거운거같아요 ㅎㅎ 그래서 탐라에 글을 많이 쓰게 되더라고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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